Murakami Haruki Archive

글 보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숲에서 1편 – <노르웨이의 숲>을 둘러싼 제목 잔혹사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본 문학 작품은 무엇일까? 2009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설문에 따르면 1위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1987년 국내 출간 이후 우리 출판 사상 가장 많이 팔린 외국 문학 작품 중 하나이자, 1990년대 ‘신인류’ 풍속도와 맞물려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사회현상까지 일으킨 소설. 당시에 얼마나 인기가 높았는지 기차 안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여자에게 ‘노르웨이 숲에는 가 보셨나요?’라는 문자를 보내며 작업을 거는 남자가 나오는 휴대 전화 광고가 만들어졌을 정도이다.(실제로 이 광고 덕에 책의 인지도도 함께 급상승했다고 한다. 단, 남자가 모르는 여자의 휴대 전화 번호를 어떻게 땄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
읽은 독자가 많은 작품일수록 많은 이야깃거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숲> 같은 경우는 본문에 들어가기도 전에 제목부터 화제를 일으켜, 아직까지도 논의되고 있다니, 이 역시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 작품의 제목을 둘러싼 몇 가지 뒷이야기를 풀어 보자.

Case 1. <노르웨이의 숲>은 아직 안 읽어봤는데…

 

“상실의 시대는 대학 때 읽었죠, 저희 때 엄청 유행이었거든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작품은 아직 안 읽어 봤는데…… 같은 작가가 쓴 거예요?”

섬네일 :

<노르웨이의 숲>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것은 일본에서 처음 출간되어 열도를 휩쓴 베스트셀러가 된 지 2년 후인 1989년. 현재와 같은 저작권법이 확립되지 않았던 당시, 이 책이 일본에서 대히트를 치자 몇몇 국내 출판사에서 원제를 살려 소개했으나 별 반응이 없었던 것을 한 출판사에서 개인주의를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한 젊은이들과 커다란 이념의 지배가 사라진 국내 세태를 반영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소개하여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90년대 수입되던 할리우드 하이틴 로맨스 대부분에 ‘~ 연애 대소동’ 같은 제목이 붙었던 예를 생각해 보거니와 직관적으로 알기 쉬운 번안 제목과 원작의 감각을 그대로 살린 어려운 원작 제목 사이에서 언제나 소개하는 사람들은 고민하게 마련이다. 어쨌거나 ‘무라카미 하루키’ 하면 누구나 떠올리곤 하는 <상실의 시대>, 옅은 푸른색 배경에 인간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떠오른 한 권짜리 판본과 <노르웨이의 숲>은 동일한 작품이다.
이후 원제를 그대로 살린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 출간된 판본과 동일한 빨간색과 초록색의 상하권 양장본이 같은 출판사에서 출판된 일도 있었으나 <상실의 시대>만큼의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2013년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으로 소설을 새롭게 번역하여 이 책을 출간하면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을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2010년대 들어와서도 1980년대 소개되었을 당시만큼이나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이번 출간은 말하자면 ‘상실된 제목’을 되돌리는 의미도 포함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작품의 이름과도 같은 ‘제목’, 작가가 지어 준 제목이 아무래도 그 작품을 설명하기에 가장 유효한 이름일 테니까.

Case 2. 그런데 ‘노르웨이의 숲’ 맞습니까?

 

“‘Norwegian Wood’는 문법상 노르웨이산 가구인데 자꾸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우기깁니까, 정말. 작가가 유명하면 답니까?”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우리말 제목은 ‘ノルウェイ’ = ‘노르웨이’, ‘の’ = ‘의’, ‘森’ = ‘숲’으로, 일본어 제목 <ノルウェイの森>을 직역한 것이다. 다만 애초에 하루키가 제목을 지을 때 따온 비틀스의 ‘Norwegian Wood’에서 wood를 森(숲)으로 번역한 것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Wood’를 ‘숲’으로 번역하려면 ‘Woods’로 표기되었어야 한다는 것. 또, 가사의 맥락을 보거니와 어느 도도한 여자에게 하룻밤 동안 얕보인 한 남자가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세계적으로 ‘취미가 좋은 물건’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북유럽 가구’들에 불을 질렀다는 쪽의 해석이 맞으리라는 것이 제목을 둘러싼 주요 논의 중 하나이다.
실제로 비틀스의 가사에서 해당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 한 여자를 알았어, 아니, 그 여자가 날 알았다고 해야 할까. 그녀가 내게 방을 보여 주었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산 가구가. 그 여자가 잠깐 있다 가라고 하더니 아무 데나 앉으라고 했어. 그래서 둘러봤는데 의자가 없는 거야. 러그에 앉아서 와인을 마시면서 시계를 흘끔거렸어. 새벽 두 시까지 얘기를 했는데 그 여자가 말하더군 “이젠 잘 시간이야.” 그 여자는 나한테 자긴 아침 일찍 일이 있다고 하더니 웃음을 터뜨렸어. 나는 안 할 생각이라고 한 다음에 자려고 욕조 속에 기어 들어갔지. 깨어 보니 혼자더군. 새는 날아간 거야. 그래서 난 불을 붙였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산 가구 말이야.”

의문이 되는 구절은 저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산 가구가.(isn’t it good? Norwegian wood.)’라는 부분으로, 아무리 봐도 집에 남자를 초대해서 애만 태우다가 잠든 여자에게 화가 난 남자가 갑자기 ‘노르웨이의 숲에서’라고 말하는 건 어색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렇게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품 제목을 잘못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작가 본인의 의견이 나와 있다.

“그래도 번역자라는 사람으로서 한마디 한다면, ‘Norwegian Wood’라는 단어의 올바른 해석은 어디까지나 ‘Norwegian Wood’이며, 그 이외의 해석은 모두 크든 작든 틀린 게 아닐까. 가사의 맥락을 보거니와 ‘Norwegian Wood’라는 단어가 가진 규정 불능한 울림이 이 곡과 가사를 지배하고 있음은 분명하며, 그것을 뭔가 한 가지로 확실히 규정한다는 행위는 어느 정도 무리가 있다. 그것은 일본어로든 영어로든 마찬가지다. 붙잡으려 하면 도망가 버린다. 물론 그 단어 자체가 함의하는 이미지 중 하나로 ‘노르웨이산 가구 = 북유럽 가구’라는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일 그게 전부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좁은 의미의 규정 방식은 이 곡의 규정 불능성이 청자에게 전하는 신비한 깊이(그 깊이야말로 이 곡의 생명인 것이다.)를 치명적으로 해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다.’가 아닌가 말이다. ‘Norwegian Wood’은 정확히는 ‘노르웨이의 숲’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산 가구’도 아니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중에서

섬네일 :

시적 허용으로 생각해 달라는 것이 내용의 요지인데, 어디로 보나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노르웨이산 가구’라는 제목이 붙은 연애 소설은 아무래도 선뜻 손이 가지 않을 테니까.
한편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폭스바겐’에 달린 ‘라디에이터’에 대한 묘사를 읽고 “폭스바겐에는 라디에이터가 없는데요.”라고 문의한 독자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에서는 폭스바겐에 라디에이터가 달렸다고 생각해 주세요.” 하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가 비틀스의 곡 제목(물론 일본에서는 작가가 작품 제목으로 쓰기 전부터도 「ノルウェイの森」라는 제목이 번안곡 타이틀로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을 있는 그대로 직역해서 사용할 의무는 없다. 또한 어릴 적부터 페이퍼백으로 영미 문학에 경도되어 있었고 커서는 본격적인 번역가로 활동한 작가가 ‘Wood’와 ‘Woods’의 차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오역을 그대로 실었으리라는 추측에는 무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경우, 독자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문학 세계 내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이 주는 감성을 필요로 하여 선택한 제목을 존중해 줄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비틀스는 비틀스, 하루키는 하루키니까.
숲이라는 단어가 주는 신비한 울림, 북구의 서늘함이 연상되는 절묘한 조합이 어우러져 탄생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아름다운 제목. 작가가 그렇게 밝힌 이상, 독자 역시 가장 마음에 드는 자신만의 해석으로 읽어 보면 어떨까.

Case 3. 너무 의도적으로 제목을 선택한 건 아닌가요?

 

“소설 첫 장부터 이 노래가 나오는 데다 중간에도 끝에도 수없이 등장하잖아요. 아무래도 작가가 처음부터 이 노래 제목으로 작정하고 작품을 쓴 거 아닌가 싶어요.”

작품과 제목이 매우 잘 어울리는 것만은 사실이다.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입에 넣자마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마들렌 한 조각처럼 첫 장부터 함부르크 공항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주인공 와타나베는 불현듯 노래에 얽힌 추억에 ‘격렬하게’ 사로잡힌다.
하지만 의외로 작가는 처음에 다른 제목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
마치 처음부터 이 곡을 표현하기 위해 쓴 것처럼 최다 등장을 자랑하고 특정 장면에 이르러서는 곡의 가사를 연상시키는 모습도 보이지만(작가가 의식해서 썼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으나 가사에서처럼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의 집에서 ‘와인을 홀짝이며 시계를 힐끔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원래 이 작품에 ‘비 내리는 날의 정원’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생각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의 피아노 연주곡 「판화」 중 ‘비 내리는 날의 정원(Jardins sous la Pluie)’에서 따온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일종의 답안으로 생각해 놓고 있었지만 끝의 끝까지 고민에 사로잡혔는데 그 이유는 이 제목이 지나칠 정도로 작품과 딱 떨어지게 어울렸기 때문. 하지만 제목으로 한참 고민 중에 부인에게 작품을 읽히고 의견을 묻자 “노르웨이의 숲이면 되지 않겠어?”라고 대답해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고.
막판에 극적으로 바뀐 제목 덕에 더욱 큰 사랑을 받는 결과를 낳은 유명한 소설 작품 이야기는 종종 접하지만(무라카미 하루키가 사랑하는 작가로 잘 알려진 스콧 피츠제럴드의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 후보로 ‘쓰레기 계곡과 백만장자들’, ‘웨스트에그의 트리말키오’,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 같은 리스트가 있었다는 건 유명하다. 결국 부인과 편집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정한 것이 지금의 제목.) 이미 <노르웨이의 숲>이 아닌 ‘그 소설’을 상상하기 어려운 우리들에게 <비 내리는 날의 정원>이라는 제목은 확실히 생소하게 들린다. 무라카미 부인의 안목에 감사를.

 

1990년대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떠올라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노르웨이의 숲>. 이번에 소개한 제목에 얽힌 에피소드에 이어 작품 속 음악, 그리고 문학에 대한 소개가 3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네이버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