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rakami Haruki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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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숲에서 3편 – <노르웨이의 숲>을 둘러싼 제목 잔혹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숲에서 1편 – <노르웨이의 숲>을 둘러싼 제목 잔혹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숲에서 2편 – Tune up! <노르웨이의 숲>이 들리는 트랙리스트

이어서 3편 <노르웨이의 숲>을 둘러싼 제목 잔혹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는 유독 도서관을 그린 글이 많다. 도서관 사서 여자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주인공을 인도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지식이 가득 찬 뇌수를 노리는 괴이한 도서관 노인이 등장하는 특이한 소품도 있고, <해변의 카프카>에 이르러서는 아예 작품의 주요 무대가 숫제 전문적이고 독특한 사설 도서관이다. 좌우지간 손에 들어오는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고, 그렇게 읽은 책의 양은 비슷한 나이 사람들에 비해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얘기할 만큼 무라카미 하루키는 방대한 독서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또 그런 자신의 독서 경험을 작품 안에 효과적으로 사용하기로 유명하다. 도서관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은 것 역시, 그가 사랑하는 ‘이야기’로 가득한 공간에 대한 개인적 체험과 환상이 반영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섬네일 : 왼쪽부터 스콧 피츠제럴드,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왼쪽부터 스콧 피츠제럴드,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는 또한 각각 작은 도서 목록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작가 본인의 취향으로 밝혀진 문학 작품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노르웨이의 숲>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번역하기도 조심스러워했다는 ‘평생의 책’ <위대한 개츠비>에서부터 20세기 미국 현대 문학의 풍부한 인용,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를 비롯한 세계 고전 문학까지, 시대 배경과 등장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적극적인 수단으로 많은 작품들이 사용되고 있다. 이번 화에서는 ‘<노르웨이의 숲> 속 작은 도서관’이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에 실린 몇몇 다른 작품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이야기 속 ‘다른 이야기’를 읽고 다시 한 번 책장을 펼치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숲’과는 또 다른 ‘숲’이 눈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Line 001: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이나 읽을 정도면 나하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 취미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위대한 개츠비>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평생의 책’으로 꼽는다. 힘들거나 외롭거나 생각날 때마다 곁에 두고 몇 번씩 읽으며, 장면들을 전부 외우고, 몇몇 경구의 경우 곧잘 인용하곤 하는 책.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위대한 개츠비>는 아마 그런 ‘평생의 책’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영일사전의 예문 페이지를 암기하는 취미에, 영문 페이퍼백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자라, 중 고등학교 시절 영어 점수만큼은 공부하지 않아도 걱정이 없었다는 그는 자기 작품에도 미국 문학에서 받은 깊은 영향을 보여 준다. 작가가 된 뒤에도 취미 반으로 계속했다는 번역 역시 존 어빙, 레이먼드 카버, 레이먼드 챈들러, 팀 오브라이언, 트루먼 커포티 등 자신이 읽고 사랑해 온 미국 현대 작가의 작품을 일본에 꾸준히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의외로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깊었던 탓인지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만큼은 그도 선뜻 손에 잡지 못한 듯. 2006년에야 ‘드디어 나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대한 개츠비>!’라는 식으로 출간되어 오랜 세월 기다려 온 독자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높은 판매를 기록한다. 1981년에 이미 스콧 피츠제럴드의 <마이 로스트 시티>를 번역한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때가 무르익기를’ 신중하게 기다린 것 같다.
<노르웨이의 숲>에서도 이 작품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온다. 정말 많이 나온다. 아예 맨 처음 주인공 와타나베의 독서 취미를 이야기할 때 꽤 긴 분량을 할애하고 곧바로 나가사와 선배가 와타나베에게 다가와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이나 읽을 정도면 나하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 것이다.

열여덟 살 때 나에게 가장 다가온 책은 존 업다이크의 <켄타우로스>였지만 몇 번 거듭 읽는 사이에 조금씩 처음의 광채를 잃고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최고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는 그 후 계속 내 최고의 소설로 남았다. 불현듯 생각나면 나는 책꽂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쳐 그 부분을 집중해서 읽곤 했는데,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한 페이지도 재미없는 페이지는 없었다. 어떻게 이리도 멋질 수가 있을까 감탄했다.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멋진 소설인지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 주변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 본 인간은 하나도 없었고, 읽어 보겠다는 생각을 할 만한 인간조차 없었다. 1968년에 스콧 피츠제럴드를 읽는다는 것은 반동으로 지목될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결코 장려할 만한 행위는 아니었다.
그즈음 내 주변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 본 인간은 단 하나뿐이었고, 내가 그와 친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가사와라는, 도쿄 대 법학부에 다니는 학생으로 나보다 두 학년 위였다. 우리는 같은 기숙사에 살아서 서로 얼굴 정도만 아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내가 식당에서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햇볕을 쬐며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데 옆에 다가와 뭘 읽느냐고 물었다. <위대한 개츠비>라고 대답했다. 그는 재미있느냐고 물었다. 지금 세 번째 읽는데 읽을수록 재미있는 부분이 늘어난다고 대답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이나 읽을 정도면 나하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본문 중에서

한편 <위대한 개츠비>는 작품 속에서 매우 중요한 암시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데이지라는 상류 사회의 여자에게 사랑을 느낀 제이 개츠비라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손에 닿지 않을 꿈을 향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이루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허무한 죽음을 맞는 일대기를 그린 스콧 피츠제럴드의 대표작으로,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친구 기즈키의 죽음이 드리운 그늘 때문에 결코 손에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친구의 여자 친구 나오코에 대한 와타나베의 마음을 어느 정도 시사한다. 특히 와타나베가 한참 동안 연락이 끊긴 나오코를 기다리며 기숙사 룸메이트 특공대가 가져다준 반딧불이를 옥상에서 풀어 주고 가만히 사라져 가는 불빛을 향해 손을 뻗는 장면은 제이 개츠비가 데이지가 사는 건너편 만의 푸른 빛을 향해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위대한 개츠비>의 해당 장면과 비교해서 읽어 보자.

그가 혼자 있고 싶다는 암시를 보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이상한 방식으로 어두운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뻗었는데, 나와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그는 확실히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부두의 맨 끝자락에 있는 것이 틀림없는 단 하나의 초록색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시 돌아다보았을 때 개츠비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나는 어수선한 어둠 속에서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이윽고 반딧불이는 날아올랐다. 반딧불이는 불현듯 무슨 생각이라도 떠올랐다는 듯이 날개를 펼치더니 거침없이 난간 너머 흐릿한 어둠 속으로 떠올랐다.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듯 급수탑 곁에서 재빨리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빛의 선이 바람에 잠겨들 동안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가 이윽고 동쪽으로 날아갔다.
반딧불이가 사라져 버린 다음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속에 오래오래 머물렀다. 눈을 감으면, 그 작고 희미한 불빛은 짙은 어둠 속을 갈 곳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고 떠돌았다.
나는 어둠 속으로 몇 번이나 손을 뻗어 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조금 앞에 있었다.
- 본문 중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서 처음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다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이 작품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책은 다름 아닌 <위대한 개츠비>다.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소설 속에서 가장 많이 사랑하는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한 작가의 작품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로서도, 스콧 피츠제럴드로서도 상당히 멋진 일일 것 같다.

Line 002: 토마스 만, <마의 산>

“어떻게 이런 데 오면서 일부러 그런 책을 가져와.”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는 작품 중 상당수는 내용을 알고 보면 절묘한 차용이라고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잘 알려진 고전 작품을 인용해서 상황이나 인물의 성격을 강조하는 예가 잦은 편.
와타나베가 나오코의 초대를 받아 그녀가 머물고 있는 정신 치료 요양원에 갈 때까지 줄곧 손에 들고 읽는 책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으로, 이 소설은 폐렴에 걸린 아내가 머무는 요양원을 찾은 토마스 만의 개인적 체험에서 나온 대작이다. ‘요양원’에 오는 길에 하필이면 ‘요양원’에 대한 책을 들고 온 것에 대해 레이코 씨가 애정 어린 타박을 하게 하는 <마의 산>에 등장하는 요양원은 나오코가 머무르고 있는 요양원과 비슷하게 각양각생의 인간들이 머무르며 바깥 세계와는 완벽하게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어, 나오코의 요양원에서 와타나베가 느끼는 감정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 준다.

나오코와 레이코 씨는 나란히 5시 반에 돌아왔다. 나와 나오코는 처음 만나는 것처럼 제대로 인사를 나누었다. 나오코는 정말 수줍어하는 것 같았다. 레이코 씨는 내가 읽는 책을 보더니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라고 대답했다.
“어떻게 이런 데 오면서 일부러 그런 책을 가져와.” 레이코 씨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 본문 중에서

<마의 산>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이곳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너는 도저히 믿을 수 없겠지만 말이야. 이들에게는 3주가 하루와 같은 거야. 너도 곧 알게 되겠지. 죄다 익히게 될 거야.” 같은 맥락에서 <노르웨이의 숲>의 요양원에 대해 나오코의 룸메이트 레이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게 여기 방식이니까. 그러니까 자기 역시 뭐든 솔직히 말해야 해, 여기에서는. 밖에서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잖아?” 세상과 분리되어 완전히 ‘이상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그들에게만은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사실 레이코의 말대로 <노르웨이의 숲>에 등장하는 요양원은 굉장히 독특한 개념의 치료소이다. 적극적인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는 대신에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된 부분’을 인정하고,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아무도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확인 아래 조용하고 목가적인 삶을 살아간다. 현대 일본에 존재한다기보다 19세기 유럽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현실과 동떨어진 장소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 안에 사는 사람들이, 마치 아주 평화로운 연옥처럼 유예하는 세계인 이 요양원에 대한 모티프는 역시 토마스 만이 그린 요양원에서 어느 정도 차용해 왔을 가능성이 높다 해도 될 것이다.(무엇보다 두 요양원 다 높은 산속에 있다.)

Line 003: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브랜디를 조금 마셨어. <수레바퀴 아래서>를 샀고, 날이 밝아 이제 돌아가. 안녕.”

와타나베가 죽은 친구 기즈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과거의 나오코와 생동감 느껴지는 생명력을 전해 주는 현실의 미도리 사이에서 고뇌를 느끼기 시작하는 시점에 읽는 책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이 책은 영리하고 순수한 소년 한스 기벤라르가 어린 시절, 빛나는 재능을 보이지만 곧 획일화된 교육 제도에 편입되고 사회의 부담에 떠밀려 모든 빛을 잃고 결국 삶의 수레바퀴 아래 매몰된다는 이야기이다.(스포일러 방지 차원에서 줄거리는 여기까지. 궁금한 분들은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 보자.) 기즈키와 나오코가 존재하는 과거와 미도리가 있는 현재 사이에서 와타나베는 8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펼치고, 다소 고리타분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브랜디를 홀짝이면서 책을 끝까지 읽은 뒤, 미도리네 집이 경영하던 고바야시 서점의 마지막 매상을 올려 준다.

나는 맥주를 마시면서 부엌 테이블에 앉아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다.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에 들어간 해였다. 그로부터 팔 년 후에 나는 여자애 집 부엌에서 한밤중에 그녀의 죽은 아버지가 입었던 사이즈가 좀 작은 파자마를 입고 같은 책을 읽는다. 뭔지 모르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수레바퀴 아래서> 같은 건 다시 읽지 않았을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조금 고리타분하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은 소설이었다. 짙게 고요가 내려앉은 깊은 밤 나는 부엌에서 꽤 즐거운 마음으로 한 행 한 행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선반에 놓인 브랜디를 꺼내 커피 잔에 조금 따라 마셨다. 브랜디가 몸을 따스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그래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 본문 중에서

<수레바퀴 아래서>를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 이상 마주치게 되는 일종의 통과의례에 대한 성장 소설로 읽을 경우, 열아홉, 스무 살을 살아가면서 나오코가 상징하는 유소년기에 작별을 고하고, 미도리에 대한 마음의 결정이 뜻하는 성장을 향해야 하는 와타나베의 상황을 확실히 보여 주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이야기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할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취향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 사람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법이다. 그렇다면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읽는지 이야기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할 수 있다.” 라고. 다독가이자 애서가로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읽고, 좋아하고, 영향을 받고, 나아가 자신의 작품 <노르웨이의 숲> 안에서 다시 한 번 되살린 책들을 통해서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를 읽는 나는 또한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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