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rakami Haruki Archive

그에게서 다시 발견한 새롭고 뚜렷한 색채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서평

 

그에게서 다시 발견한 새롭고 뚜렷한 색채

글 : 박종호 (풍월당 대표)

내 인생의 여정 앞에는 늘 나보다 몇 발 앞서서 걷고 있는 기분이 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명이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그는 나보다 10년 정도 연상인데, 그는 여행을 하고서(그의 많은 글들은 여행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는 여행이 그에게 집필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일 것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일본 집으로 돌아와서, 좀 쉰다.(글을 읽어 보면 바로 쓰지 않고 얼마간 숙성기를 갖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글을 쓰고 그것이 일본에서 책으로 출간되어 화제를 모으고, 또다시 우리나라에서 관심을 보인 뒤(요즘에야 전 작품이 즉시 번역되는 작가가 되었지만) 번역 작업에 들어가 국내에서 출판되고, 그리하여 내가 출판 사실을 알게 되어 구입하여 드디어 읽게 된다.(구입했다고 다 곧바로 읽는 것은 아니다. 읽어야 할 책들이 늘 밀려 있어서, 읽게 되기까지는 내 책장에서 또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면 작가가 책을 썼을 때부터 보통 10년 정도가 지난 기분이 든다. 그러다 보니 책을 쓸 때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물을 바라보던 시선이 책을 읽는 내 나이의 시선과 많은(사실 아주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시선뿐만이 아니라 글 속의 배경, 풍경, 소품, 유행하는 것들, 책이나 음악, 사건이나 상황 등도 그러하다.

그런 공감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독자들에게도 비슷하게 다가오리라는 짐작을 해 본다. 그의 작품 속에는 나의 관심사와 흡사한 아이템이 가득하다. 야구, 맥주, 스파게티는 그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좋아하며(마라톤, 재즈, 고양이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작품의 테마를 전할 때 자주 사용하는 고전음악 역시 나의 집중력을 고무시킨다.

소설 속에서 현실이 아닌 또 하나의 가상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교묘하게 병치하며 내세우는 것은 작가가 자주 써 온 방식이다. 초기작 『양을 쫓는 모험』에서부터 그런 분위기가 나타났으며 『해변의 카프카』에서 형식적 완성을 보여 주지만 가장 직접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방식으로 이 기법을 쓴 것은 아마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일 것이다. 이 작품이 보여 주는 거대한 두 개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을 각각 그려 낸다. 그와 차이는 있지만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프로이트 당대에 감히 무의식을 문학의 테두리 안으로 처음(의식적으로는 아마도) 집어넣어서, 프로이트보다도 확실하고 더욱 눈에 띄고 선명하고 실재할 것만 같은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었다.  프로이트의 현학적이며 복잡한 원고를 통해서는 쉽게 그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도 슈니츨러의 문학을 통해서 가슴으로 쉽게 무의식 세계를 즐겼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설정한 두 세계는 마치 땅 밑에 존재하는 두 개의 거대한 터널이 이윽고 만나게 되는 식의 결론으로서, 두 세계는 결국 통하며 나아가 두 세계는 분리할 수 없고 따라서 하나일 수도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런 방식은 『1Q84』에서도 반복해서 나오는데, 이 소설을 먼저 읽은 사람들은 그 신선함에 매료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전작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맛보았던 사람이라면, 이런 작가의 방식이 다만 과거 수법을 반복하고 더욱 장대하게 만들었을 뿐 도리어 참신하지는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런 구성은 신작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식으로 부활하였다.

이전 작품들에서처럼 두 세계를 단순히 병치시키는 것을 넘어선 것이다. 즉 여기서 두 세계는 서로 넘나들고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움직이고, 현실과 꿈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이 독자를 혼란시켜 함께 그 나른한 몽정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준다. 이는 이분된 세계의 발전된 형태이며 작가의 깊은 고민에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생각된다. 단순한 대위법이나 명확한 화성학의 규칙에 매여 있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나 『1Q84』가 마치 슈베르트나 브람스의 음악이라면, 그에 비해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현대적인 화성이나 불규칙한 악식법을 마음껏 활용하는 쇤베르크나 베베른을 연상시킨다. 그런 점에서는 좀 더 현재적인 작품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으며, 형식을 지키려는 의도 대신에 좀 더 유연하고 무심하게 내던지는 맛이 느껴지는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는 유달리 자주 고전음악이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악곡 제목을 스치듯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서 음악을 중요한 모티브의 하나로 제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또한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1Q84』에 나와서 화제가 된 야냐체크의 「신포니에타」는 사실 대중적인 작품도 아니고, 소설을 읽은 사람이 음반을 사서 플레이어에 넣는다고 해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음악이 아니다. 사실 야나체크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또한 감동적인 작품은 상당히 많다. 특히 그의 피아노곡들과 몇 편의 오페라는 고전 음악의 최고봉에 근접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신포니에타」에 관해서는 그런 평가를 쉽게 내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서점 입구에 탑처럼 쌓아 놓은 「1Q84」 책들이 눈앞에서 점점 줄어들었던 것처럼, 그 옆에 함께 쌓아 놓았던 조지 셸 지휘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신포니에타」 CD(이미 절판되었던 음반인데, 소설에서 언급되는 바람에 음반사에서 다시 찍어 내었다. 그야말로 음반조차 부활시킨 하루키 파워다.)의 탑도 함께 눈앞에서 줄줄이 사라져 버리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음반을 가져간 분들이 모두 야냐체크의 관현악곡을 즐겼는지는 별도로 하고, 한 영향력 있는 작가의 언급이 다른 장르에까지 큰 반향을 일으킨다는 점에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우리나라에서는 2000장 정도의 판매를 기록했는데, 소설이 나오기 전까지 한두 장도 나가지 않던 음반이 이만큼 판매되었다는 것은 역시 대단한 일이다.) 그 외에도 작가의 작품 속에는 고전 음악이 많이 등장하는데, 『해변의 카프카』에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곡 「대공」이 자세하게 언급되지만, 그 반향은 「신포니에타」에 미치지 못했다.

이번 신작에서는 리스트의 피아노 소곡집 「순례의 해」가 단순한 언급의 차원을 넘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분명 리스트의 이 대형 피아노 곡을 들어 보고 싶어질 정도다. 주인공 쓰쿠루는 그의 아파트에서 후배이자 친구인 하이다가 가져온 LP판을 듣는다. 그것은 피아니스트 라자르 베르만이 녹음한 세 장짜리 LP 박스 「순례의 해」인데, 두 사람은 함께 이 음악을 듣곤 한다. 그러다가 하이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쓰쿠루의 곁을 떠난다. 그때 하이디가 놓고 사라진 LP를 보며, 쓰쿠루는 그것을 이별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로 쓰쿠루는 「순례의 해」를 혼자서 듣는다. 그 곡은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시로가 곧잘 연주하던 곡이기도 했다. 그는 음악을 들으면서 고등학교를 나온 이후 친구들로부터 추방당한 슬픔을 위로해 나간다. 그가 듣는 것은 세 장의 LP 중 첫 번째 판의 뒷면 즉 제2면이다. 그것은 모두 3년으로 나뉘어 있는 「순례의 해」의 제1년 스위스 편 중 「르 말 뒤 페이」(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향수병」으로 번역하는데, 작가는 “전원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라고 설명한다.)에서부터 시작하여, 제2년 이탈리아 중의 네 번째 곡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제47번」까지의 모두 여섯 곡이다. 쓰쿠루는 이 여섯 곡을 반복해서 듣는다. 더불어 독자들도 이 여섯 곡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쓰쿠루는 자신을 버렸던 고등학교 친구들로부터 당시 절교의 이유를 듣기 위해서 네 명의 친구 하나하나를 찾아서 순례 길에 오른다. 마치 리스트의 곡명처럼…….

네 친구들과 헤어진 지 아니 그들로부터 추방당한 지 16년 만의 일이다.

그의 순례는 핀란드에서 끝난다.(애독자들에게 ‘헬싱키’는 낯선 곳이 아니다. 이미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글에서도 심심찮게 언급되었다.) 거기서 마지막 친구 구로를 만나고, 그녀로부터 이해와 위로를 얻는다. 그로써 그는 그동안 하염없이 무너져 가던 정신을 어느 정도 회복한다. 도쿄로 돌아온 쓰쿠루는 이제 새로 살아갈 이유와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앞에는 다시 떨리고 마음 졸이는 일상, 낯설고 새롭지만 보통 사람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유명한 표현대로 ‘작지만 확실한’ 일상을 기다린다. 최근 하루키 소설들의 마지막이 주로 그렇듯이, 무척이나 희망적으로 말이다. 작품 내내 회의와 비관으로 일관해 온 작가의 입장을 보면 아주 놀라운 희망이다. 이것은 최근 예순을 넘긴 후에 하루키의 글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변화다.

이번 작품의 첫 장면은 자살을 생각하는 베르테르처럼 어둠과 죽음으로 가득 찬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순례를 통하여 그렇듯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하여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평온과 자유를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해야 할 일과 창조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을 위해서 주어진 임무처럼 그런 일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 예술가다.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결말에서 어렴풋하지만 안개 사이로 그런 예술가의 책무가 느껴지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초기 작품에서는 사회에 대한 색깔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고 종종 스놉한 소시민적인 세련됨만이 멋지게, 그러나 회색빛으로 보였던 하루키였다. 그런 그의 작품 세계에 이제 그의 아름다운 색채가, 비록 희미하지만 분명한, 원색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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