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rakami Haruki Archive

상처가 힘이 되기까지 ― 나와 너는 걷는다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서평

 

상처가 힘이 되기까지

― 나와 너는 걷는다

글 : 임경선 (『나라는 여자』저자)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처럼 어느 날 갑자기 뚜렷한 이유도 없이 절교당하거나 소외당해서 상처 받은 경험, 내겐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마음과 미소를 나누다가 돌연 서먹한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시선을 회피하며 그들끼리 주고받는 눈빛, 질문에 억지 미소와 함께 피우는 딴청, 몇 차례 다이얼을 돌려도 끊기기만 하는 전화, 이윽고 내가 알아서 먼저 그들로부터 멀어져 간다.

‘그냥 사라져 줘.’

무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이유를 알면 납득이나 반성이라도 하겠지만 이유를 알려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상대를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음을 그들은 안다. 나를 대놓고 괴롭혔다면 원망이라도 하겠지만 평소와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오직 나 하나만 전염병 환자처럼 남은 모두를 위해 사라져 주면 된다. 어떤 예기치 못한 일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그 부조리한 정황을 소화시키지 못한 채 계속 정신적 체기를 내장에 달고 다니는 느낌을 준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지 속 시원하게 얘기를 해 줘. 그럼 내가 고칠게.” 자존심을 내던지고 말미에 그 무리 중 한 명에게 매달렸다. 그녀는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내뿜고는 일부러 늦장을 부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궁금해할 거 없어. 말한다고 어떻게 될 일도 아니고.” 어린 시절 전학이 잦았던 탓에 소외감이 주는 먹먹함이 뼛속 깊이 각인된 나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런 기분을 다시 느낄 줄은 몰랐다.

여전히 누군가는 나를 전면으로 부정할 수 있다. 그것도 매우 효과적으로. 일대일의 관계가 아닌 일대 다수의 관계에서 이런 일은 단순히 슬프고 화나는 것을 뛰어넘어 사람을 출구가 안 보이는 절망에 빠뜨린다.

 

책을 읽으며 쓰쿠루의 고통이 전해졌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고교 시절 절친했던 네 명의 남녀 친구들로부터 하루아침에 절교를 당하고 그 충격 때문에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는, 빈껍데기 같은 대학 시절을 보낸다. 그 이후 그는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힘겨워하며 소모적인 연애만 몇 차례 거듭하다 서른여섯 살이 되어서야 연상의 여자 친구 사라의 설득으로 과거에 입은 상처와 직면하기로 결심한다. 용기를 내어 16년 만에 네 친구를 만나러 고향 나고야와 저 멀리 핀란드로 떠나는 것이다.

나의 경우, 가장 예민한 상처를 입힌 친구의 페르소나를 내 단편소설에 집어넣었다. 원망 어린 복수는 아니었다. 아무리 찾아 봐도 행방을 알 수 없던 그녀가 우연히라도  그 이야기를 읽고 연락해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땐 나한테 왜 그랬던 거니?’라고 묻고 싶었다. 쓰다 보니 뒤끝인지 그리움인지 헷갈리기는 하지만.

쓰쿠루나 나는 어쩌면 사람 신경을 묘하게 거스르는 비호감 나르시시스트형 인간일까? 그러나 어쨌든 당시에는 깊고 차가운 바다 한가운데 빠진 것처럼 시체 같은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그건 무척 쓰린 일이었다.

그런 순간의 절망감이 얼마나 차가운지 알기 때문인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소설을 더없이 따뜻하게 써 내려갔다. 단언컨대 작가의 지난 모든 소설 중, 이 소설은 가장 따뜻하다. 그토록 따뜻하게 차가운 현실을 짚어 준다. 그 어느 것도 결코 돌이킬 수는 없다고.

나에게 딱 맞는 장소와 사람들을 찾았다는 행복과 안도를 느끼지만 어떤 계기로 나는 그들을 잃는다. 그들은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고, 나는 나대로 혼자 설 수밖에 없다. 세월은 사람 자체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한때 이름처럼 개성 넘치는 색채를 가졌던 쓰쿠루의 친구들은 어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면서 저마다의 빛을 잃어 간다. 처음부터 빛나지 않던 것보다 한순간 빛나다가 그 빛을 잃는 것이 더욱 슬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렇게 조금씩 훼손되어 가는 것일까? 일본을 등지고 핀란드에 이주한 구로는 그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하다가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쓰쿠루를 다정하게 쳐다보며 말한다.

“쓰쿠루, 우리가 우리였다는 거,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니었던 거야. 우리가 하나의 그룹으로서 일체감을 가졌다는 것 말이야. 난 그렇게 생각해. 설령 그것이 몇 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단호하게 말을 이어 간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았어. 나도 너도. 그리고 살아남은 인간에게는 살아남은 인간으로서 질 수밖에 없는 책무가 있어. 그건 가능한 한 이대로 확고하게 여기에서 살아가는 거야. 설령 온갖 일들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해도” 찰나의 행복한 세월이었다 해도, 그것이 이윽고 상실되고 고통으로 변질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를 지탱시켜 준 그 시간들은 충분한 가치 있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그 시절을 애도하고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친구들을 만나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여전히 혼란스럽고 풀리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쓰쿠루는 자기가 처한 상황 안에서 소년의 마음으로 돌아가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 나갈 것을 결심한다. 아직 완벽하게 ‘납득’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하기로 한다. 그 자신이 무색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투영된 빨강, 파랑, 하양, 검정 친구들을 담고 그렇게 또 걸어간다.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성실하게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고, 길을 걷는 자들은 함께하던 길이 갈라졌다 하더라도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쓰쿠루’가 일본어로 ‘만들다’라는 의미의 단어라는 것은 상징적이다. 우리의 삶은 각자가 만들어 나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자키 쓰쿠루의 행보를 보며 왜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서른여섯이 되어서야 비로소 과거의 트라우마를 직면할 수 있게 된 것인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아직 삶을 잘 모르던 20대였다면 나 역시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뭐야, 지질하게. 끙끙 혼자 구석에서 앓지 말고 어서 직접 가서 따지고 알아 봐!” 그러나 마흔이 지난 나는 쓰쿠루에게 그만한 세월이 필요했음을 안다. 나 역시도 그만큼의 세월을 필요로 했으니까. 인생의 중간 지점까지 왔을 때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과거의 상처를 회복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일까. 나 또한 과거의 상처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나를 저 밑바닥부터 흔든 과거의 어떤 사건들과 마주하고 그 때 내게 어떤 작용이 일어났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그에 대한 에세이까지 썼다. 더 이상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과거는 계속 내 속 어디엔가 존재했다. 기억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비탄과 절망,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해도 마주하지 않으면 인생의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겠다는 확실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복잡하고 불완전한 청춘에게 마침내 안녕을 고해야만 했다.

쓰쿠루는 머나먼 핀란드까지 가야 했지만, 단편소설에 등장시켰던 나의 ‘그녀’는 알고 보니 바로 한강 건너 살고 있었다. 지난 10여 년간 그토록 수소문해 봐도 행방이 묘연해서 외국에 사는 줄로만 알았다. “연락처 알려 줄까?” 그녀와 여전히 연락하고 지낸다는 한 지인은 나의 놀란 표정을 보더니 물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날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우리의 관계는 다시는 예전처럼 될 수 없다. 그때 왜 나한테 그토록 가혹했어야 했는지 더 이상 물을 필요는 없었다. 명확한 답 없이도 나는 씩씩하게 살아 나가야만 한다. 하물며 서른여섯 살 쓰쿠루도 그 심신이 타 들어가는 여정을 소화한 후, 불완전한 결론과 불확실한 사실에 좌절하는 대신 스스로를 더 선명하게 재생시키려 하지 않았던가. 내 세계의 변화는 늘 나에게서 시작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아무리 멀리까지 가도, 아니 멀리 가면 갈수록, 우리가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그저 나 자신밖에 없다.’

 

상처가 힘이 되기까지, 우리는 걷고 또 걸어야 한다. 그 당연한 사실을, 그 빤한 진실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통해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수긍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작가 자신이 그 누구보다 끊임없이 앞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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