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rakami Haruki Archive

또 하나의 상실의 시대에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서평

또 하나의 상실의 시대에

글 : 정혜윤 (PD)

 

지난해 여름 일본에 취재를 갔다. 비정규직 문제 때문이었다. 고이즈미 정권 이후 일본에도 신자유주의 물결이 불어 닥쳤다. 일자리와 주거를 모두 잃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넷카페 난민’(잠잘 곳이 없어서 인터넷 카페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들), ‘신빈곤’, ‘격차 사회’, ‘하류 사회’라는 말이 화제에 올랐다. 일을 해도 가난한 ‘워킹 푸어’에 대한 특집 방송도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장기근속, 상대적 고임금, 사회 보험, 각종 법정 수당, 기업의 복리 후생 혜택을 받는 정규 고용의 중심부와, 잦은 직장 이동, 저임금, 기업 복리 후생은 물론이고 사회 보험이나 각종 수당을 받기 어려운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과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체 노동자의 20% 정도만 중심부이고 80%는 주변부였다. 내가 오사카에 취재를 갔을 때 스펙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지는 않았지만 막 자기 계발 열풍이 불기 시작해서 대기업 정사원이 되기 위한 면접 요령 같은 것을 가르치는 학원, 스피치 학원 등이 생겨나고 있었다. ‘난 자유롭게 살고 싶어, 이전 아버지 세대(회사 동물이라고 불렸던)처럼 일만 하고 살지는 않을 거야. 난 다르게 살 거야.’라고 외치며 두세 개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쪽을 택했던 프리터족 사이에서는 불안감과 피로감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내가 인터뷰한 미혼 프리터들은 반드시 정규직과 결혼하겠다고 다짐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죽음의 모습은 과로사 아니면 고독사라는 말이 노골적으로 언급되었다. 난데없이 1920년대 소설 「게 가공선」(일본 북부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게를 잡는 노예선에서 겪는 비참한 노동 이야기)이 80여 년이 지난 지금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1년 3월 11일, 일본 열도는 강도 9의 대지진과 연이어 밀어 닥친 쓰나미 그리고 원전의 붕괴가 낳은 방사능에 대한 공포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일을 하며 행복하게 이 사회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노동 문제와 원전 붕괴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던 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라는 질문을 일본 사람들 가슴에 불러일으켰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주최한 도쿄 요요기 공원의 반 원전 시위에는 무려 17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1Q84』에서 묘사했던 ‘리틀 피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까?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효율성을 외치는 사고방식을 따른 원전이 지옥문을 열어젖혔다고 표현했다. 그 무렵 일본 사람들 사이에 생명, 목숨을 뜻하는 ‘이노치(命)’라는 단어가 관심을 모았다. ‘이노치’는 무엇일까? 그전에는 당연히 돈이라고 말했다.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이노치’는 무엇이지? 대체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지? 지금까지 살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질문이 방사능 측정기를 들고 다니며 마스크를 쓰고 동북부의 농산물을 먹으려 들지 않는 사람들 마음속에 묵직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바르셀로나에서 일본의 원전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난 다음 장편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무엇을 쓸까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다만 이렇게 말했다.

 

“핵발전소의 사고, 그 자체를 그리기보다는, 더 내적인 무엇, 심리적인 부분을 그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인들이 갈림길에 놓여 있는 중대한 시기이니만큼, 그에 맞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미래의 우리 생명이 무엇인지를 결정지을 갈림길 앞에서 나온 소설, 심리적인 것을 그리려 했던 소설이 바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일까? 인간은 색채를 잃어 가고 사물은 점점 노골적인 색채와 광채를 띠는 이 찬란한 자본주의 시기에 쓰쿠루는 무엇을 위해 무슨 색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가?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서른여섯이고 미혼이고 느낌이 좋은 용모의 소유자고 도쿄의 좋은 공과 대학을 나왔다. 그는 비록 세부 사항에선 차이가 나더라도 어린 시절에 동경했던 철도역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전혀 어렵지 않다. 오히려 돈 버는 데 동물적 후각을 지녔던, 부동산업자 아버지 덕에 부유한 편에 속한다. 그가 좋아하는 일은 철도역에 가서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서 블랙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에게 도쿄는 익명으로 살아가기에, 혹은 망명객처럼 살아가기에 이상적인 곳이다. 다자키 쓰쿠루 눈에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우리의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아이팟으로 음악을 듣거나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어쨌거나 어디론가 이동하면서, 아니 엄밀히 말하면 정처 없이 유동하면서.

 

신주쿠 역은 거대하다. 하루에 총 35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 역을 지나간다. 환승을 위해 이동하는 사람의 흐름이 여기저기서 마구 얽히면서 위험한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그렇게 압도적인 사람의 물결이 일주일에 5일, 아침저녁으로 두 번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는 역무원들에 의해 아주 매끄럽게 별 탈 없이 흘러간다니 참으로 믿기 힘들 정도이다. 특히 아침 러시아워가 문제다. 사람들은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서두른다. 정해진 때 출근 기록을 남겨야 한다. 명랑할 수도 없고 느긋할 수도 없다. 거의 숨 쉬기도 힘들 만큼 빽빽이 들어찬 차량 안은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마구 짓누른다.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게 신기하고, 사고로 유혈 참사가 벌어지지 않는 게 신통하다고 쓰쿠루는 언제나 감탄한다. 1990년대 초, 아직 일본 경제의 거품이 이어지던 시절, 미국의 한 유력지가 겨울 아침 러시아워에 신주쿠 역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 모습을 찍은 사진을 실었다. 거기에 찍힌 통근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통조림에 든 생선처럼 생기 없이 어두운 표정이었다. 기사는 ‘일본은 분명 유복할지 모른다. 그러나 많은 일본인은 이처럼 고개를 숙인 불행한 모습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사진은 유명해졌다. 많은 일본인이 실제로 불행한지 아닌지, 쓰쿠루는 잘 모른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람들은 매일매일 통근하는 데 소비하는 걸까, 쓰쿠루는 생각해 본다. 편도 평균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람들은 매일매일 출근하는데 소비하는 걸까? 하루에서 그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을 인생에서 무엇보다 유익한 시간, 양질의 시간이라 부르기는 힘들지 않을까. 사람의 인생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이런 (아마) 의미 없는 이동을 위해 박탈당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 본문에서

 

쓰쿠루는 이것은 자신이 고려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얼마나 불행한지는 그 사람 나름대로 판단하면 될 일이다, 하고 생각한다. 그의 역할, 그것은 엄청난 사람들의 흐름을 적절하고 안전하게 이끄는 것이다. 그 세계에 성찰은 필요 없다. 그저 검증된 실효성이 필요하다. 그에게 역은 그가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에게 유일한 장소는 지금 이 자리다. 한 치의 오차도 군더더기도 없이 진행되는 정시에 들어오는 기차처럼 유지되는 확실성의 세계. 그는 그 확실성의 세계 바깥의 무한한 불확실성의 세계에는 관심이 없다.
어쨌거나 그는 그 도시에서 상처도 슬픔도 강렬한 감정도 없이 무사히 살아왔다. 친구라 할 만한 사람도 없었고 그저 몇 번의 평온한 만남들이 있었다. 마음을 파고드는 어떤 일을 경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역은 또 그에게 다른 사실도 알려 준다. 그에게 ‘가야 할 장소는 없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테제 같은 것이었다. ‘쓰쿠루에게는 가야 할 장소도 없고 돌아갈 장소도 없다.’ 그렇지만 가야 할 장소와 돌아가야 할 장소가 있던 시절이 딱 한 번 있기는 있었다.
소설 초반에 그는 이미 우리가 인생에 꿈꾸는 것을 이룬 상태다. 고등학교 시절 그에게는 완벽한 케미스트리(chemistry)를 이루는 우정의 공동체가 있었던 것이다. 남자 셋 여자 둘. 그들의 이름에는 우연히도 다 색깔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자키 쓰쿠루의 이름에만 어떤 색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은 ‘색채가 없는 인간’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 어느 날, 별다른 설명도 듣지 못하고 그 굳건한 우정의 공동체에서 추방당해 버린 다음부터 그는 고향을 잃어버린 인간이 되어 버린 듯하다고 느낀다. 돌아갈 곳을 잃은 인간이 된 것이다. ‘쓰쿠루에게는 가야 할 장소도 돌아갈 장소도 없다.’ 그다음에 만난 대화가 잘 통하던 연하의 친구 역시 리스트 「순례의 해」 음반을 남겨 놓고 설명도 없이 떠나 버린다.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와 그가 얼마나 텅 빈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다 확인한 다음에는 어딘가로 가 버린다. 그다음에는 텅 빈, 또는 더욱더 텅 비어 버린 다자키 쓰쿠루가 다시금 혼자 남는다. 나는 내용 없는 텅 빈 인간일지도 모른다. – 본문에서

 

어쩌면 가야 할 곳을 찾기 위해서일까? 그는 순례 여행을 떠난다. 앞날을 보기 위해서 과거 일을 돌아본다. 과거에 그를 추방했던 친구들을 만난다. 색채가 없는 자로서 여행을 떠난다. ‘아마도 나한테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이렇다 할 개성도 없고 선명한 색채도 없어. 내가 내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그가 만난 친구들 모두 과거의 색깔과는 꽤 달라져 있었다. 이제 블루니 옐로니 하는 단일한 색깔은 없다. 나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는 자의 색깔, 나라는 존재란 없다는 듯 주위에 휘둘리기만 하는 자의 색깔,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은 존재로 사는 자의 색깔, 이 사회와 똑같아지려는 자의 색깔, 직장을 떠나서는 아무런 교류도 없는 자의 색깔, 죄책감과 수치심을 가진 자의 색깔, 변명하고 싶은 자의 색깔, 이해를 구하는 자의 색깔, 자신감과 용기가 없는 자의 색깔, 어떻게든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고 싶어 하는 자의 색깔. 친구들은 모두 이런 색깔들을 켜켜이 깔고 있었다.
그런데 다자키 쓰쿠루의 이름에는 색깔 말고 다른 것이 있었다. 그는 친구의 핀란드인 남편을 만난다.

 

“다자키 쓰쿠루라고 합니다.”
“쓰쿠루라면, 뭔가를 만든다는 한자를 쓰는 그 쓰쿠루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쓰쿠루입니다.”
“저도 뭔가를 만듭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뭔가를 만듭니다.”
“다자키 씨는 어떤 걸 만듭니까?”
“저는 철도역을 만듭니다.”
“저는 도자기를 만듭니다. 역에 비하면 아주 작은 거예요.”
- 본문에서

 

다자키의 이름에는 색채가 없지만 ‘만든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순례 여행 끝에 다자키 쓰쿠루가 알게 된 것은 이런 것들이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한때 ‘내가 나였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였다는 것’,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그는 이 여행의 끝에 뭔가를 만들고 싶어 한다. 아무것도 없던 땅에 역을 만들어 사람들이 내릴 수 있게 되듯이. 그는 이 순례 여행에서 비로소 그가 갇혀 있던 철도역 바깥의 세계를 배우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이제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새로운 역이다. 이 새로운 역은 그가 지금껏 만들었던 역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를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지치고 불완전한 존재들인 ‘우리’를 위한 장소일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순례 여행처럼 이 여행도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인 시간이었고 미래를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을 빌리자면 진실이 밝혀지는 시간이었다.

어떤 순간이든 진실은 밝혀진다. 삶과 죽음에 관한 진실. 나의 고독과 나와 세계의 유대에 관한 진실, 우리 각자와 우리 고독의 하찮음 그리고 지고의 소중함에 대한 진실이. 우리의 근본적인 애매성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살기 위한 힘 그리고 행동에 대한 이유를 끌어내야하는 것은 바로 우리 삶의 진정한 조건들에 대한 지식 속에서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에서

이 소설에 대한 여러 가지 반응이 있겠지만 하루키가 빚어낸 어떤 남자 주인공보다도 타인을 향해 내미는 손이 절실하다는 점만은 사실이다.

 

‘그러는 사이에 몸의 중심 가까이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1년 내내 녹지 않는 동토의 중심부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그 동토를 녹이기 위해서 쓰쿠루는 다른 누군가의 온기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체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본문에서

 

다자키 쓰쿠루가 가야 할 곳, 돌아갈 곳은 가슴속 동토의 왕국이 아니다. 그 온기를 녹여 줄 바깥세상, 누군가일 것이다. 성찰이 필요 없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효율적인 확실성의 세계가 아니라 함께 뭔가를 만들어 가지 않으면 한없이 애매하고 불확실한 세계일 것이다.
다자키 쓰쿠루의 개인적 상실과 일본 사회가 앓고 있는 집단적 상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상력 속에서 어떻게 만나는가? 상실감에 빠지지 않게 우리를 지켜 주던 우정, 사랑, 신뢰. 이런 것들이 다 같이 위기에 빠진 이 시기에 이런 고민을 하면서 읽어 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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