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rakami Haruki Archive

마흔, 아직은 하루키가 필요한 나이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서평

 

마흔, 아직은 하루키가 필요한 나이

글 : 강유정 (영화 평론가, 문학 평론가)

 

1. 하루키 하니?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떤 정서이고 징조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그의 문장이 보여 주는 어떤 것, 이를테면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맛보는 것이기도 하다. 세련됨이란 진지하지만 심각하지 않은 것,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사려 깊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정서를 독창적이면서 단순한 문장으로 표현해 낸다. 고백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면 언제나 그의 문장을 훔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것은 너무 미묘하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했다간 자칫 과녁을 어긋난 화살처럼 엉뚱한 의미에 가 닿고 말, 그런 징후들이다. 예민하고 미묘한 세계를 언어의 틀에 담아내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은 그렇게 잘 벼린 칼처럼 섬세하다. 섬세한 문장은 세상을 바라보는 지극히 예민한 관찰력의 반영이기도 하다. 문장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읽는 데 멈추지 않고 ‘하루키 하게’ 한다.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사이 스무 살 생일을 맞이했지만 그 기념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 본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첫 문장은 주술과도 같다. 첫 문장에서 독자는 우리를 떨리게 했던 하루키의 매혹과 재회한다. 그의 세련되고 단정한 문장은 하루키 독서에서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대가이다. ‘Simple & Straight’, 그의 문장 속에서 독자는 복잡하고 시시한 삶이 정돈되는 상쾌함을 느끼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에는 투명한 햇살에 건조한 100퍼센트 코튼의 정결함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하 『색채가 없는』)는 스무 살에 대한 환기로 시작된다. 다자키 쓰쿠루의 스무 살은 죽음과 함께 떠오른다. 그런데 이 첫 문장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출세작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만다.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서른일곱 무렵에 다시 스무 살을 떠올린다. 나오코, 스즈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말이다. 말하자면 『노르웨이의 숲』이 친구들의 죽음만을 생각했던 스무 살의 공간이라면 『색채가 없는』은 나의 죽음에 골몰했던 스무 살의 공간이다. 닮은 듯 보이지만 어쩌면 이 두 세계가 정반대의 극에 놓여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른손을 내민 내가 거울 속에서는 왼손을 내밀듯, 어떤 점에서 『색채가 없는』은 『노르웨이의 숲』의 반영, 모든 것이 거꾸로 놓인 반영일지도 모른다.
이런 식이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비틀즈의 음악이 와타나베를 20대로 데려갔다면 『색채가 없는』에서 20대의 기억은 복귀가 아닌 완벽한 이별을 위해 호명된다. 20대를 불러오고 있지만 그것을 정리하는 방식은 정반대다. 그것은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노르웨이의 숲』의 인물들, 그 서사와의 결별이기도 하다. 와타나베와 나오코, 기즈키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고 20대를 제대로 넘기지 못했던 인물들이다. 와타나베만이 가까스로 죽음으로부터 빠져나와 과거를 기억하고 기록한다.
하지만 『색채가 없는』에서 죽음만을 생각했던 다자키 쓰쿠루는 살아남는다. 아니, “고독하고 갈 곳 없는 한정된 장소에서 완결을 추구하는 빛”을 가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죽음을 관찰했던 와타나베와 달리 죽음을 딛고 세계로 나온다. 그렇다면 그는 왜 죽음만을 생각했고 또 어떻게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었을까, 『색채가 없는』을 읽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2. 젊음과 죽음, 그 흐트러짐 없는 조화

쓰쿠루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마음이 너무도 순수하고 강렬하여 거기에 걸맞은 구체적인 죽음의 수단을 마음속에 떠올릴 수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구체성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다. 만일 그때 손이 닿는 곳에 죽음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면 그는 거침없이 열어젖혔을 것이다. – 본문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어젖힌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서 『상실의 시대』로 번역되었을 때 그 정서가 손에 닿듯 구체적으로 다가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문은 20대의 순결한 영혼만이 열 수 있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죽음은 순수하고 강렬한 열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와타나베에게 20대가 서사적 현재이자 방황의 현장이었다면 『색채가 없는』에서 20대는 인생의 큰 크레바스이자 공백, 결핍으로 묘사된다.
다자키 쓰쿠루의 20대가 공백으로 남게 된 데에는 친구들의 영향이 크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각각의 이름에 색깔이 들어간 네 친구들과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를 경험한다. “우연히 생겨난 장의 힘”이기도 한 그 공간 안에서 그들은 다섯 손가락 같은 안정감을 공유한다. 아카, 아오, 구로, 시로 그리고 다자키 쓰쿠루로 이루어진 모임은 순결한 10대이기에 가능했던 완벽한 케미스트리를 이룬다. 그런데 네 친구들이 설명도 없이 한꺼번에 쓰쿠루로부터 등을 돌려 버린다. 쓰쿠루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친구들은 물을 기회도 틈도 주지 않았다.
결국, 다자키 쓰쿠루는 깊은 고독에 빠지고 “인두로 지진 듯 볼이 날카롭게 선 젊은 남자”로 달라진다. 친구들로부터의 거절은 그의 생애 처음 맞는 고통이자 상처였다. 그는 결국 완전히 달라진 자신을 받아들인다. 스무 살 무렵, 노골적인 거절을 통해 그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원형으로서의 10대를 떠나게 된다.
완벽한 조화의 공동체는 ‘젊음’의 보편적 표정이기도 하다. 순결한 젊음, 청춘, 20대는 누구에게나 그렇게 『르 말 뒤 페이(Le Mal du Pays)』,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그리운 그리움의 목적지이다. 누구나 다 자신의 20대를 그리워하며 산다는 뜻이다.

다자키 쓰쿠루라는 인물의 특별함은 여기서 비롯된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 주위를 맴돈다. 상처로부터 회복되지 않는 이상 인간은 나이를 먹고 주름 진 피부를 갖게 될 뿐 성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자키 쓰쿠루처럼 다시 20대의 유적지를 방문하지는 않는다. 애써 그 시절은 기억의 저 편에 묻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자키 쓰쿠루는 자신의 기원을 찾기 위해 상처를 되짚는다.

중요한 것은 그가 크레바스에 빠져 있다는 것을 누구도 쉽사리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 말이다. 이 부분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에로틱한 장면 중 하나인데 그의 등에 있는 어떤 스위치를 눌러 준 여자가 바로 이 크레바스를 발견해 낸다. 사라는 어딘가에 잘 감춰 둔 기억이라 할지라도 거기서 비롯된 역사를 지울 수 없다며, 근원을 밝혀야 한다고 말해 준다. 상처의 기원을 스스로에게 납득하지 못하는 한 어른이 될 수 없다는, 다른 누구를 진정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자신의 상처를 이해한다는 것은 자아의 구멍을 찾는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스스로 세운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아가 없는 남자가 다른 자아, 타자를 사랑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므로 사라를 사랑하기에 앞서 그는 그 크레바스를 메워야만 한다.

 

3. 모험에서 순례로

이 소설에서 ‘상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내면에 새겨진 상처고 다른 하나는 외부 환경이 남긴 상처이다. 트라우마가 전자라면 가난이나 계층, 계급으로 인한 현실적 장애물의 자상이 후자일 것이다. 완벽한 중상류층 가정의 아이였던 다자키 쓰쿠루의 상처가 트라우마, 고독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깊게 패인 볼과 엄청나게 빠진 살은 곧 마음에 새겨진 상처의 발현인 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주는 댄디하고 쿨한 감각 역시 그 상처가 사회적, 경제적 맥락에서의 결핍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다섯 명의 아이들이 겪는 고통은 ‘자아’라고 부르는 추상적 결여에 기대고 있다. 경제적, 사회적 부족함을 결핍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들이 겪는 고통은 결여로 구분하는 것이 옳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두드렸던 1990년대의 포문도 이런 것이었다. 그러니까 시대나 사회, 경제적 여건과 별개로 예민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자아의 빈곤, 그런 문제를 소설 전면에 내세웠던 것이다.

서른여섯이 된 다자키 쓰쿠루가 자신의 과거, 그 결락을 메꾸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일컬어 무라카미 하루키는 순례라고 칭한다. 그곳에서 쓰쿠루는 형편없이 변해 버린 유적지, 20대와 만난다.

다자키 쓰루쿠의 순례에 독자를 초대하는 가장 큰 동력은 바로 친구들이 왜 다자키 쓰쿠루를 버려야만 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다. 비밀의 핵심을 파헤치는 과정은 독자에게 흡사 추리소설이나 탐정소설을 읽는 듯한 강한 호기심을 준다. 그런 점에서 『색채가 없는』은 일종의 화이더니트(whydunit) 서사와 닮아 있다. 그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과거 무라카미 하루키의 서사는 대개 ‘모험’이었다. 『양을 쫓는 모험』이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같은 초기작의 인물들은 아직 정해지지 않는 인생의 길을 모험하는 사색적 탐구자로 그려졌다. 사색적 탐구자의 모험이라는 이율배반적 아이러니는 그의 소설이 주는 매력이기도 했다.

그런데 『색채가 없는』은 그의 지나온 인생을 순례한다. 모험과 순례 사이에 그동안 하루키의 문학적 여정이 자리 잡고 있다.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는 역을 만드는 것으로 요약된다. 과거의 일들을 만나고 순례해서 그 일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 그것은 곧 기억의 역을 만드는 것과도 같다.

역을 만드는 행위는 1975년 출생, 1994년 대학 입학과 같은 연대기의 작성과도 닮아 있다. 연대기는 무정형으로 흐르는 세월의 표지판 구실을 한다. 그것은 애초부터 존재할 리 없는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무력한 인간의 안타까운 노력이기도 하다. 삶이란 쓰쿠루(創)들이 아니라 쓰쿠루(作)들로 채워진다.(두 한자의 일본어 발음은 똑같이 ‘쓰쿠루’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록의 시간적 상상력을 역이라는 공간적 질감으로 리뉴얼한다. 그는 여전히, 낯익은 상상력을 낯선 표지로 그려 내는 데 탁월하다. 『색채가 없는』은 어른스럽고 점잖은 소설이다. 색채가 없던 다자키 쓰쿠루의 삶에 색은 순례 끝에 말갛게 떠오른다. 희뿌연 젊음의 흙탕물은 시간의 마법을 거쳐 말간 물과 침전물로 분리된다. 그렇게 상처는 가라앉고 삶은 떠오른다. 마흔이 되어도 성장이 필요한 어른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필요한 절대적 이유이다.

다른 리뷰 읽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