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rakami Haruki Archive

다시 하루키를 읽는 시간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서평

 

다시 하루키를 읽는 시간

글 : 백영옥 (소설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이 소설의 제목을 내가 자주 바꿔 부르리라는 걸 예감했다. 2010년 그의 소설 『1Q84(일큐팔사)』를 ‘아이큐 84’나 ‘원큐팔사’로 읽는 사람을 보았다. 한동안 나는 이 소설을 ‘1Q48′이라고 잘못 불렀다. 급하게 원고를 써야 할 일 때문에 1Q84를 다시 읽기 시작한 어느 날, 달이 두 개 뜨는 것만큼이나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저녁을 먹고 걸어오다가, 먼 서쪽 하늘에서 목성과 금성 사이에 초승달이 일직선으로 줄 서 있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이게 대체 뭐지?” 한눈에도 기이한 그 모습을 보다가 그날, 기사를 검색했다. 신문은 이 천문 현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금성과 목성이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는 현상은 행성들의 공전 주기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난다. 금성의 공전 주기는 약 225일이고, 목성의 경우 약 11년 10개월이다. 금성과 목성, 그리고 지구의 공전 주기가 맞아떨어지면 이 현상을 관측할 수 있다. 오늘 밤 지구에서 보이는 금성과 목성은 손가락 두 개 간격으로 떨어져 있어 거의 겹쳐 보이지만, 실제로 지구와 이들 행성의 간격은 금성의 경우 약 1억 2200만km, 목성은 8억 4400만km이다.

기사를 보다가 나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금성과 초승달과 목성의 직립, 그것이 우주적인 사랑처럼 느껴지는 밤이었다. 나는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기 시작했다. 융 심리학자이기도 한 가와이 하야오와의 대담집이며, 출판사와 잡지에서 진행한 인터뷰 등도 찾아 읽었다. 헤어진 첫사랑과 다시 사랑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러므로 이번 소설을 오랜 밀회를 앞둔 여자처럼 기다렸다. 이 책은 내게 ‘마침내’라거나 ‘드디어’라는 부사를 덧붙일 법한 것이었다. 하지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는 엄청나게 복잡한 제목을 본 순간, 이해하기 힘든 습벽을 가진 헤어진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마음이 되어 버린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책을 받아들고 ‘색채가 없는’이란 형용사를 읽었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DNA를 이식한 식물성의 소년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소설이 피붙이처럼 절친했던 네 명의 고등학교 동창들, 아카(빨강), 아오(파랑), 시로(하양), 구로(검정)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자신에게만 색채가 없다고 생각한 남자가 겪은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일 것을 짐작했다. ‘인간에게는 1층, 2층 외에 지하실이 있는데, 바로 지하실에 기억의 파편과 진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라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바로 그 이야기인 것이다.

남자 셋 여자 둘이라는 구성 자체가 처음부터 얼마간의 긴장을 일으키는 요소를 내포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남녀 둘씩 커플을 이루면 하나가 남는다. 그런 가능성이 늘 그들 머리 위에 작고 단단한 삿갓구름처럼 드리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날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 본문에서

이들 완벽한 다섯 명의 친구들은 서로의 다른 성격을 포용하며 완벽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줄곧 ‘기차역’에 매혹당했던 다자키는 고향 나고야의 친구들을 뒤로한 채 혼자 도쿄로 향했다. 그리고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가슴 벅찬 재회를 기대하던 다자키에게 그들은 돌연 절교를 선언했다. 공황 상태에 빠진 그는 절교의 이유를 묻지 못한 채, 6개월 동안 삶이 아닌 죽음의 경계 위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라는 첫 문장은 내겐 더 이상의 옵션 없이 완벽해 보였다.

대학 졸업 후, 역을 설계하는 기술자가 된 다자키는 더 이상 도망가지 말고 그때의 과거와 마주해야 한다는 연인 사라의 충고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16년 만에 절교의 이유를 찾기 위해 나고야의 친구들을 찾아 순례를 떠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하나의 비극과 그 비극의 비밀을 풀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의 이름을 확인하게 된다. 그 친구를 찾아 핀란드 행을 결심하는 시점에서 소설은 점점 상처 속을 좇는 모험이 되어 간다. 도쿄에서 나고야,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호반 도시인 헤멘린나를 넘나드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만난 정신 분석의는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치유’라는 말은 정신 분석학 쪽에서 상당히 예민하게 써야 할 개념이란 말을 했었다. 그에 따르면 치유란 상처가 나아 가면서 생기는 흉터까지 모두 없애겠다는 얘기인데, 그런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처란 그저 시간 속에 묻히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그때 나눈 말들을 떠올렸다.

진화론을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은 상처를 받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극복하고 한 단계 성장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이 꼭 그러한가라는 의문에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를 믿는다.’라는 말은 이때 ‘조개의 여린 살에 모래알이 박히면 ‘진주’가 된다는 믿음 뒤에는 대부분의 조개가 모래알 때문에 폐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라는 말로 변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길 하는 사람들에겐 인간은 슬픈 쪽으로 평등하며, 슬픈 쪽으로만 진화한다는 말이 가슴에 더 와 닿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처는 그 사람을 끝내 죽이고 만다.

실제 다자키 쓰쿠루는 죽음 직전에서 기적처럼 삶 쪽으로 넘어온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쓰쿠루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마음이 너무도 순수하고 강렬하여 거기에 걸맞은 구체적인 죽음의 수단을 마음속에 떠올릴 수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구체성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다. 만일 그때 손이 닿는 곳에 죽음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면 그는 거침없이 열어젖혔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침에는 소설을 쓰고, 오후에는 주로 번역 일을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소설의 초고를 반년 만에 쓰고, 반년 동안 퇴고했다고 한다. 그의 패턴으로 보면 꽤 짧은 시간이다. 작가 자신도 ‘다자키 쓰쿠루’는 처음에는 짧은 소설로 쓸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얘기한 적이 있다. 상처의 시간을 좇아가는 수순은 의외로 단순하며 집중해야 할 것은 내면 풍경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모험을 기대하고 핀란드행 비행기에 함께 탑승했던 나는 ‘다자키’와 ‘구로’와의 대화에 등장하는 ‘악령’이라는 말에 맥이 풀렸다. 뭐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의 진실성보다는 그 모든 일들, 모든 비극 뒤에 악령이란 단어가 숨어 있었다는 말에 얼마간의 허무함을 느낀 것이다.

이 소설을 읽다가 어쩔 수 없이 홍상수의 영화를 떠올렸다. 「극장전」이나 「하하하」, 「북촌 방향」의 줄거리와 주인공들을 모조리 헷갈리곤 하는 나 자신의 모습 말이다. 직업마저 똑같은 홍상수의 주인공은 아마도 김상경이거나, 김태우이거나, 유준상일 것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는 동안, 다자키 쓰쿠루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한꺼번에 뒤섞이기 시작했다. 『양을 쫓는 모험』의 백영옥 버전이라고 해 두자. 그 모험에서 나는 이쯤에서 나올 법한 섹스 장면과 저쯤에서 등장할 장면과 대화의 패턴 대부분을 알아맞혔다. 그것은 특유의 ‘리듬’이 아니라 ‘동어 반복’이라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체험이었다. 어쩌면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너무 많이 읽었거나, 너무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홍상수의 영화와 다른 게 있다면 그를 읽은 곳이 관객 없이 텅 빈 극장은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이번엔 실망했지만,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저 자신은 모두 좋다고 생각하며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닿지 않는 곳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계속 읽어 주는 독자가 있다는 것은 책이 몇 만 부 팔리는 것보다 즐거운 일입니다. 열심히 몰두해서 쓰고 있습니다. 부디 제 다음 작품도 읽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을 쓰기 직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교토대 강연회의 마지막 말을 읽었다. 나는 내가 그의 작품을 읽지 않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달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게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고 있었다. 이때의 ‘내게’는 작가인 나이며 ‘내가’는 독자인 나이다. 아마도 나는 카프카와 줌파 라히리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그러하듯 그들의 식성과 마라톤 스케줄을 꿰고 있진 않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이미 그의 다음 소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누군가에게 좋은 소식인지는 모르겠다.

다른 리뷰 읽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