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rakami Haruki Archive

요나는, 그리고 쓰쿠루는 고독이 아닌 연대를 원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서평

 

요나는, 그리고 쓰쿠루는 고독이 아닌 연대를 원한다

글 : 박수현 (번역가)

2010년 발표한 에세이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무라카미 라디오2』(원제『커다란 순무, 어려운 아보카도』) 에서 하루키는 “당신의 20대는 어떤 것인가? 혹은 어떤 것이었나? 사실 이건 내가 상당히 진지하게 알고 싶은 문제다.”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2013년 4월, 자문자답하듯 그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후 『색채가 없는』으로 통칭)라는 책을 내어놓았다.
『색채가 없는』은 그가 말했듯 시간적인 줄거리로 요약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내면에서 일어난 일들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짧게 요약해 보자면 내용은 이러하다.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사이좋은 5인조 그룹에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방출되었다. 절교를 당한 스무 살 무렵에는 죽는 것만을 생각했다. 서른여섯의 쓰쿠루는 그 사건을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새로 사귄 여자 친구는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라며 그의 등을 떠민다. 그렇게 쓰쿠루는 잃어버린 친구를, 깊숙이 묻어 둔 자신의 20대를 찾아 순례를 떠난다. 옛 친구들을 차례로 만나 알아낸 절교 사건의 진실은 한 사람의 거짓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세 명의 오해,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낸 한 사람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누군가는 기존 작품의 반복이라 말할 것이다. 하루키 소설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여성 조력자 ‘걸프렌드’는『양을 쫓는 모험』에서 (귀를 드러내면 대단한 미녀로 변신한다는) ‘키키’였으며, 이번에는 ‘사라’다. 사라는 단편집『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중「벌꿀 파이」에 등장한다.『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서 차용한 것도 있다. 등장인물들의 연결 고리였던 리스트의 음반, 평범하지 않은 손가락(한 개가 많거나 모자라거나), 누군가의 신체(또는 그 일부분이) 들어 있으리라 추정되는 항아리, 하루키 주인공치고는 드물게 특별한 의미가 담긴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그러하다.『노르웨이의 숲』과 유사하다는 이들도 있다.『색채가 없는』은 하루키의 특기인 “존재하지 않는 것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환상 문학적인 요소가 줄어들어, (이쪽 세계가 아닌) 저쪽 세계를 그리지 않고 현실만을 다루는 리얼리즘 소설에 가깝다. 게다가 노르웨이나 핀란드나 북유럽 아닌가!
이처럼 소설 전반에 뿌려진 암호를 수집해 가며 작품을 해석하고자 하는 경향은 유독 하루키 독자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난다.(이런 점에 대해 일찍이 오쓰카 에이지가 「하루키 소설은 왜 ‘수수께끼 풀이’를 유발하는가」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아니다. 그의 소설은 이전 작품과의 연결 고리이자, 보물찾기의 보물처럼 흩뿌려진 코드를 찾고 싶게 만든다. 이에 대해 하루키 스스로는 “기억력이 나쁠 뿐, 재활용이 아니다.”라며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자신을 ‘뒷산 원숭이 같은 놈’이라 생각해 달라고 부탁할 뿐이지만 말이다.
또 누군가는 이번 소설이 한때 일본에서 유행했던 ‘치유계’(요즘 한국의 트렌드인 ‘힐링’이다.)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할지도 모른다. 과연『색채가 없는』은 그렇게 평가될 소설일까.

사실『색채가 없는』은 주제 면에서 ‘전환’ 이후 하루키 작품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그는 데뷔 이래 ‘기억’과 ‘이야기’에 관해 거듭해서 이야기해 왔다. 단지 이번에는 ‘기억’과 ‘이야기’를 전면으로 드러냈을 뿐이다.
우리는 과거의 좋지 못했던 기억을 감추어 두고서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살아간다. 기억을 감추어 둔 곳은 우물일 수도 서랍장일 수도, 일각수의 두개골일 수도 있다.(이러한 비유에 대해 하루키는 자기 안에 내재하는 이야기(또는 기억)를 꺼내는 작업이 그것들과 유사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하지만 사라의 말처럼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51쪽)다. 감추어 둔 기억을 꺼내서 상실과 결락을 메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하루키는 『언더그라운드』이후 타인의 ‘이야기’에게 함부로 자아를 맡기는 것을 매우 경계한다. 거짓 ‘이야기’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세 친구는 이제 예전과 같은 ‘조화로운 관계’에 속해 있지 않다.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낸 시로의 결말은 참혹하다.

기억을 꺼내 자신에게 일어난 ‘역사’를 인정하면서 쓰쿠루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런이런(やれやれ)”이란 입버릇이 사라진 하루키의 주인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서 언급한 에세이집에서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의 소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러한 역할을 해 주길 바란다’던 하루키는『색채가 없는』에서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365쪽)라며 인간과 인간과의 연결(연대)에 관해 이야기한다.
지난 5월, 하루키는 교토대 강의에서 『1Q84』를 쓴 이후 인간과 인간을 이어 주는 ‘이야기’의 역할, 자신이 지금껏 쓰지 않았던 이런 것들에 대해 인간적 관심이 생겼다고 밝혔다. 전공투의 실패를 통한 개인적 체험에 근거한 일들로 그는 지금껏 사회적 문제에 입을 열지 않는 작가였으며, 바로 이 점이 하루키 비판의 주요 근거로 사용되어 왔다. 하루키 주인공들의 수동적이고 관조적인 태도는 ‘detachment(방관)’라는 주제로 이어져 왔고, 이는 그만의 ‘있을 곳 찾기’ 방식이었다. 그랬던 그가 원전 사태에 대해, 영토 문제에 대해 기고문을 송고하는 등 ‘참여’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자키 쓰쿠루에게는 가야 할 장소가 없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테제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는 가야 할 장소도 없고 돌아갈 장소도 없다. 예전에 그런 게 있었던 적도 없고, 지금도 없다. 그에게 유일한 장소는 ‘지금 이 자리’이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는 생각했다. – 본문에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요나, 혹은 작업 중인 예술가」에서 요나는 ‘solitaire(고독)’가 아닌 ‘solidaire(연대)’라는 글자를 남겨 놓고 죽은 채 발견된다. 창작을 위해 이제는 고독이 아닌 연대가 필요함을 깨달은 것이다. 요나는 하루키가『색채가 없는』에서 인용한, 성경에서 고래 배 속에 들어간 인물이다.(물론 성경보다는 카뮈의 요나에 더 가깝다.) 하루키는 옴 진리교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인터뷰한 두 권의 책『언더그라운드』와『약속된 장소에서』를 통해 ‘detachment(방관)’에서 ‘commitment(참여)’로의 변모를 보여 주었다. 그는 이제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에서 ‘연대’로 넘어가고자 한다. 연대를 위한 첫걸음은 나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 망각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 역사를 인정하고 이를 통해 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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