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rakami Haruki Archive

인생은 둘 다 필요로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서평

 

인생은 둘 다 필요로 한다

글 : 안천 (현대 일본 문학 연구자)

단숨에 읽었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멈추기 힘든 마력이 숨어 있는 듯했다. 눈은 계속해서 다음에 올 문장을 향해 내달리려 했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글자를 읽은 후, 심장과 위의 중간 지대쯤 되는 부분에 진한 허전함이 남았다. 뭔가 결정적인 결여를 느꼈다. 거기에 당연히 자리하고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어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약간의 동요에 휩싸였다. ‘소설 속으로 빨아들이는 힘’과 ‘읽은 후에 남은 위화감’ 사이의 괴리가 여간 큰 게 아니었다.
다 읽은 후에 머릿속에 남아 있던 여러 모양의 잔상들이 서서히 걷힌 후 그 느낌은 두 가지 감상으로 귀결되었다. 예전의 하루키와는 많이 다르다. 이게 첫 번째 감상이다. 활동적이고 생기 있는 특유의 스타일 대신 조용히 빛바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한편, 생각지 않았던 의외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루키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가 이렇게까지 농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을까? E.H. 카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라는 경구에 따르자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하 『색채가 없는』)는 한 개인의 삶에서 ‘역사’가 현현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기분 좋게 허를 찔렸다. 이게 두 번째 감상이다.

 

1. 기억은 지울 수 있어도 역사는 지울 수 없다

반복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이 또 있을까?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51쪽) 『색채가 없는』에서 이 말은 세 번이나 등장한다. 처음에는 주인공 쓰쿠루가 전례 없는 호감을 품게 된 여인인 사라가 쓰쿠루에게, 나머지 두 번은 쓰쿠루가 고등학생 시절 친구였던 아카마쓰와 구로노에게 각각 한 번씩.
문예 비평가인 안도 레이지(安藤礼二) 역시 이 작품이 간행된 직후, 트위터에서 “『색채가 없는』의 포인트는 아마 다음 한 줄에 담겨 있는 게 아닐까 한다.”라며 앞에 인용한 문장을 꼽고 있다. ‘기억과 역사’. 『색채가 없는』을 관통하는 핵심 테마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주목하며 『색채가 없는』에 관한 우리의 짧은 순례를 시작해 보자. 이를 위해 기억에 관한 또 한 편의 소설인 『노르웨이의 숲』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2. ‘기억’으로서의 『노르웨이의 숲』

『색채가 없는』에서 하루키는 30대 후반의 남자 주인공에게 스무 살 전후의 기억과 대면케 한다.
이는 적어도 이미 한 번 있었던 일이다. 서른일곱인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는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했을 때 비행기 안에서 흘러나온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을 듣고 18년 전 기억을 떠올린다. 그 곡을 좋아했던, 그리고 마지막에는 교토 근방의 숲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나오코에 대한 기억을. 더불어 와타나베 자신이 경험했던 그 전후의 기억을. 죽음과 성, 타나토스와 에로스가 혼란스레 뒤섞인 이 기억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은 미숙한 청춘을 형상화한 서사임과 동시에 자기 나름의 세상과 자아의 관계 설정 방식을 일찌감치 체득한 조숙한 청년의 자아상이었다. 무정형한 경험의 카오스로 이뤄진 ‘내용(경험 자체)’과 일정한 방향으로 질서를 부여하려 하는 ‘형식(경험의 구조화)’의 격투였다.
와타나베는 “나를 잊지 마.”라는 나오코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기억들을 쥐어짜 낸 잉크로 글을 써 간다. 달리 말해 『노르웨이의 숲』은 서른일곱의 와타나베가 스무 살에 죽은 나오코를 위해 쓴 기억의 보고서이다. 그 목적은 해를 거듭할수록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기 전에, 될 수 있는 한 그 당시를 있는 그대로 글로 재현해 내는 데 있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의 내러티브 구조상,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현장감 넘치는 청춘의 묘사조차도 그 모든 것이 기억에 의거한 재현이다.
대부분이 자신의 기억이기에 화자는 소설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태이며, 글은 과거의 재현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에 화자의 현재와 철저히 단절된 자기 완결적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기억’이며, 현재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과거를 끌어 담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다.

 

3. ‘역사’를 그린 『색채가 없는』

한편, 『색채가 없는』에서는 현재의 필요가 과거의 기억을 호출한다. 『색채가 없는』의 화자는 일방적으로 과거를 떠올리던 서른일곱의 와타나베와 달리 소설 속 시간의 흐름에 보조를 맞춘다. 쓰쿠루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쓰쿠루의 폐로 호흡한다. 여기에서 현재는 과거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과거를 찾아나서는 모험가이다.
과거와 현재의 철저한 분리를 물리 법칙처럼 지키던 『노르웨이의 숲』과 달리 『색채가 없는』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과거, 현재, 미래가 촘촘하게 유기적으로 맞물려 가게 된다. 처음에 과거는 조심스럽고 치밀하게 쓰쿠루의 현재와 격리되어 있었지만 둘을 가르던 경계선이 불분명해지면서 뒤섞이기 시작하다가 급기야는 현재가 과거를 새로 윤색하고, 과거가 현재를 흔들어 깨우기에 이른다. “과거와 현재가, 기억과 감정이 병행하여 등가로 흘러갔다.”(270쪽) 이리하여 과거는 어느 한 지점에 정지되어 있는 머나먼 기억이 아니라, 현재와 함께 맥동하는 ‘역사’로 새로이 태어난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의 타자, 즉 사라가 쓰쿠루에게 특정한 과거에 대한 직시를 권유한다는 점이다. 사라와 함께 하는 미래를 손에 넣으려면 쓰쿠루는 우선 16년 전에 스스로 봉인했던 고통스러운 과거와 다시 대면해야 한다. 그녀는 말한다.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봐야만 하는 걸 보는 거야.”(129~130쪽) 보고 싶은 것이 아닌 봐야만 하는 것. 이 말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자기의 해석만으로 만들어진 기억이 아닌, 기억의 빈자리를 포함한 실제 과거. 따라서 이는 ‘기억은 지울 수 있어도 역사는 지울 수 없다.’의 변주곡이기도 하다. 두 문장 모두 사라의 말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그렇다. 역사는 타자에 의해 도래하는 것이다.

 

4. 서사의 윤곽

하루키의 소설에 이러한 역사 철학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다만, 서사의 윤곽이 눈에 띌 정도로 뚜렷해 보인다. 이야기는 분리에서 융합으로, 단절에서 교통으로 향한다. 먼저 여러 형태의 단절과 분리가 제시되고, 차례차례 이들의 거리가 좁혀져 간다.
하나만 예를 들자. 왜 사라는 쓰쿠루에게 과거와 대면할 것을 강하게 권하는가? 쓰쿠루와 하나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사라는 쓰쿠루와 섹스를 하면서도 하나가 됨을 느끼지 못했다. “같이 보낸 밤에, 당신이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서로를 끌어안은 우리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128쪽) 나는 이렇게까지 명료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진 섹스를 본 적이 없다. 사라는 한 번의 섹스로 쓰쿠루의 내면이 16년간 짊어져 온 문제를 직관한다.
농밀한 인간관계로부터 버림당했을 때 받은 날카로운 상처가 너무도 아파, 16년 전에 쓰쿠루는 자기 자신과 분리되어 자신의 고통을 마치 남의 것처럼 바라보는 내적 태도를 확립한다. 쓰쿠루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분리를 사라는 직감한 것이다. 따라서 이야기는 자연스레 상처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 이 분리를 치유함으로써 농밀한 인간관계를 추구할, 즉 사람을 사랑할 용기를 갖는 쪽으로 향하며 마지막에는 서사 문법대로 그 용기를 회복한다. 서사의 도식이 지극히 명확해 보인다. 대체로 서사의 통일성이 강할수록 각 장면들이 지닌 고유한 인상은 반비례하여 부각되지 않는다.
한편, 『노르웨이의 숲』은 장면의 생동감에 비교적 더 역점을 두고 있다. 내러티브 구조상으로 봤을 때 대부분의 장면들은 기억의 재현에 불과하지만, 사실 소설의 뼈대가 되는 명료한 윤곽의 서사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독자는 내러티브 구조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장면 장면의 고유한 매력에 쉽게 매료된다. 달리 말해 서정이 서사를 압도한다. 그런 면에서 『색채가 없는』과 『노르웨이의 숲』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따라서 두 소설을 단순히 서사 구조, 혹은 등장인물의 특성만을 추려 내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놓쳐서는 안 될 두 소설의 차이점을 마지막으로 확인해 두자. 『색채가 없는』에서 우리는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시니컬하면서도 절실함이 담긴 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244쪽)
30대 이후에야 실감하게 될 아이러니한 인생의 한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젊었던 하루키는 무겁지 않은 아이러니를 애용했다. 이제 하루키는 무게 있는 아이러니를 신중하게 던진다. 가벼운 아이러니는 그 경쾌함으로 과거를 상대화하지만, 무거운 아이러니는 그 육중함으로 과거를 골똘히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인생은 둘 다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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