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rakami Haruki Archive

죽음의 죽음 : 쓰쿠루(作)에서 쓰쿠루(創)로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서평

 

죽음의 죽음 : 쓰쿠루(作)에서 쓰쿠루(創)로

글 : 허희 (문학 평론가)

 

단호하게 인생을 정의하는 사람보다는 신중하게 인생에 접근하는 사람이 미덥다. 미쁜 이는 인생에 대해 말할 때 ‘~이다’라는 평서형이 아니라 ‘~일지도 모른다’라는 추측형의 화법을 구사한다. 예컨대 하루키는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우리네 인생에는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 법이죠.”(304쪽)라고 쓴다.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그는 순리를 의심하고 역설을 옹호한다. “어이, 이런 거 엄청난 패러독스라는 생각 안 들어?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244쪽) 소설 속 등장인물 누구의 발화이든 관계없이 이것은 하루키의 일관된 태도이며 그가 ‘꼰대’가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60년 넘게 세상을 산 하루키보다 어린 연배의 어떤 ‘어른’들은 종종(실은 자주) 후속 세대에게 자신의 삶을 답습하도록 강요하곤 한다. 그 행태에 숨이 막힐 때마다 하루키의 글을 찾아 읽었고 그러면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으므로 그곳을 향해서 정해진 길을 따라 열심히 가야한다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그는 굳이 거기에 따를 필요가 없음을 맥주와 재즈와 섹스를 통해 보여주었다. 한국에는 『상실의 시대』로 번역된, 『노르웨이의 숲』을 탐독하면서 스무 살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나도 꽤 모범적인 청년으로 자랐을 것이다.
하루키의 책을 접하게 되면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편안하게 살기는 어려워진다. 평탄하게 살려고 하면 눈을 감고 귀를 막아야만 하는데, 그의 작품은 술과 음악으로 매혹하면서 자꾸 이것저것 보고 듣게 만든다. 그러고는 캐릭터에 몰입한 독자로 하여금 사랑과 이별을 거쳐 죽음과 방황을 겪게 한 뒤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장으로 이끌어 놓는다. 가히 하루키 소설의 서사 문법이라고 할 만한 일련의 경로를 체험하고 나면 도저히 예전의 생활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 나를 포함한 수많은 하루키 애독자, 아니 하루키 중독자의 탄생은 아마 이렇게 시작됐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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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多崎つくる)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7쪽) 이러한 문장으로 서두를 여는 소설을 앞에 두고 고개를 돌리기는 여간해서 쉽지 않다. 곧 이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9쪽)라는 구절과 마주하고 나면 이제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다자키 쓰쿠루가 죽음에 압도당하게 된 이유와 경과, 그 이후의 사정이 몹시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하루키 작품처럼 이 소설에서도 사건의 동기가 무엇이었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부차적인 일에 불과하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결과의 합리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령 모든 문제의 원흉이 “악의 비유가 현실적인 형상으로 나타난 악마”(102쪽)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다. 그리하여 구로(에리)의 토로 — “그놈(악령 : 인용자)은 닿을락 말락 유즈 뒤에 달라붙어 목덜미에 차가운 입김을 불어 가며 조금씩 조금씩 그 애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간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도무지 설명이 안 돼. 너에 대한 것도, 거식증도, 하마마쓰에서 일어난 일도.”(360쪽) — 는 비논리적이지만 사태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될 수도 있다.
이는 미도리카와의 언급과도 완벽한 대구를 이룬다. 그는 실례(實例)에 뒷받침되는 결론을 주장하는 하이다에게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그러나 때로 그런 구체적인 예는 그것이 나타나는 시점에 이르면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라는 하나의 지점으로 귀결되고 말아. 거기에는 중간이 없어. 이른바 정신의 도약. 거기서 논리는 거의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해.”(103쪽) 어쩌면 진정한 논리는 궤변과 닮아 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런 식으로 대화하고 수긍한다.
평상시에는 자명하다고 인지하지만 실은 불명확하기 짝이 없는 것들은 도처에 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내던져진 현존재로서의 인간, 실존부터가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1994년 국민교육헌장이 폐지되기 전까지 한국 학생들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전문을 암기하고 읊어 대기도 했지만, 애당초 목표가 정해진 출생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 우선은 그저 목적 없는 삶을 살아내야만 한다. 그것은 과거에는 신이 머물렀다고 알려진, 그러나 현재에는 신이 없는 장소에 가는 순례와 유사하다. 순례자가 실재하는 신을 찾으려고 순례를 떠나지 않듯이 인간이 명시적인 목적을 추구하려고 살아가지는 않는 까닭이다. 도착의 안도보다 중요한 것은 여정의 순간이다. 다자키 쓰쿠루가 옛 친구들을 방문하는 행위는 외면상 여행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이와 같은 관점에서 구도자의 순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단서는 기모토 사라에게도 있다. 그녀는 다자키 쓰쿠루에게 내면의 상처를 어설프게 덮어두지 말고 제대로 봉합하라고 충고한다. “이제 상처 입기 쉬운 순진한 소년으로서가 아니라 자립한 한 사람의 전문가로서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봐야만 하는 걸 보는 거야. 그러지 않으면 그 무거운 짐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야 해.”(129~130쪽) 결국 그녀의 제안대로 다자키 쓰쿠루는 핀란드까지 이어지는 도정에 오르게 된다. 이처럼 그의 순례를 추동하고 동시에 귀착점이 되는 기모토 사라는 특별히 주목을 요하는 인물이다.
하루키 소설 중에서도 유달리 이 작품은 명명에 많은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데, 원문을 찾아보면 ‘기모토 사라’의 한자어가 ‘목원사라(木元沙羅)’로 명기되어 있다. ‘사라(Sarah, 沙羅)’는 ‘쓰쿠루(つくる)’처럼 색채가 없으면서도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종교적인 이름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기독교의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Sarah). 9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절대자의 은총을 입어 히브리인의 조상이 될 이삭을 낳은 그녀는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로 칭송되고 있다.
둘째, 불교에서 부처가 열반에 들었던 숲을 이루던 사라(沙羅). 사라쌍수(沙羅雙樹) 혹은 사라수(沙羅樹)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부처가 이생에서 보낸 마지막 자리에 있었기에 인도에서 신성하게 받들어지고 있다.
위에 제시한 두 가지 사례 중에서 다자키 쓰쿠루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작명은 아무래도 사라(沙羅)이다. 전술했듯이 그는 그녀를 만났던 덕분에 곡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363~364쪽)
부처는 사라숲에서 멸도(滅度)하여 차안에서 피안에 이르렀고, 다자키 쓰쿠루는 사라와 조우하여 능동적인 삶의 방향성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 네 명에게서 존재를 부정당했을 때 다자키 쓰쿠루라는 소년은 사실상 숨을 거두었던 것”(57쪽)이고, 훗날 그 죽음을 사라로 경유하여 다시 죽음으로써 “자신의 색깔”(108쪽)을 긍정하는 인물로 환생한 것이다. 기존에 있던 무엇인가를 만드는 ‘쓰쿠루(作)’에서 새로운 무엇으로 비롯되는 ‘쓰쿠루(創)’로, 순례의 결실이 아니라 순례의 길에서 그는 변화한다. 그의 이름이 소설에서 ‘작(作)’이라는 한자 대신 그 독음을 히라가나로 풀어 쓴 ‘쓰쿠루(つくる)’라고 표기되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만물의 무상함을 통관한 부처와 다자키 쓰쿠루의 마지막 깨우침은 다르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중략)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436~437쪽) 그 마음을 붙잡을 수는 없을지언정, 그 마음을 읽는 내내 사유했으므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기반으로 독자 제현 역시 하루키의 순례에 동참한 셈이다. 돌고 돌아 다자키 쓰쿠루의 발걸음은 기모토 사라를 향한다. 그의 결단이 머뭇거리는 나와 당신, 우리의 행보를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