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rakami Haruki Archive

하루키, 이토록 필요한 작위의 세계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서평

 

하루키, 이토록 필요한 작위의 세계

백지은(문학평론가)

도무지 저 멀리서부터 돌아서 오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멋쩍은 질문, 내가 나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나의 육체가 이 세계에 (우연하게도) 물질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우연적인 물질이 시간성을 통과하며 일관된 지속성으로 정의되어 이 세계에 좌표화 되어야 한다. 육체는 늙고 병들고 마침내 사라지는 방향으로 쉼 없이 가고 있는 허무한 것이나, 어찌된 연유인지 우리는 모두 열심히도 살고 있다. 말을 배우고, 친구를 사귀고, 교환 체계에 편입되고, 욕망을 분절하여 문법화하고, 쌍방향으로 오가는 힘들의 압력을 중재하면서, 그러다가 또, 모든 말을 잊고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싶다는 기분을 어쩌지 못해 괴로워하거나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불편하고 무의미하여 서러워져도, 살아 있는 우리는 매순간 ‘나로서’ 세상에 있다. 말하자면, 세계와 대면하여 자기와 타자의 공속과 대립이라는 연속적 운동 속에서, 자기와 세계의 분리와 통합이라는 불안한 균형 위에서, ‘나’는, ‘나’라는 정체성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출렁이고 흔들리며, 그렇게 가까스로만, 있다, 있어야 한다.

자기와 세계를 나누었다 합치고 합쳤다 나누는 그 갈등과 화해의 운동을 일러 ‘이야기’ 또는 ‘서사’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란 결국 그와 세계 사이의 거리 조정으로부터 마련된 그의 독자적인 삶에 다름 아니다. 또는, 이야기를 짓는다는 것은 자기와 세계 사이의 틈을 발견하고 그것을 메우거나 매듭지어 ‘나’라는 독자적인 존재를 위한 삶을 경작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삶에 옷을 입히고 표정을 그린다. 이야기는 삶에 금을 그어 방을 놓고, 삶의 길을 내고 역을 만든다. 그렇다, 역을 만드는(作) ‘쓰쿠루(作)’의 이야기, 그 통합과 고립, 죽음과 재생의 서사는, 온전히 쓰쿠루라는 한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마음에 새겨” 가는 현장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한쪽 끝에는 다섯 친구의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로부터 경험했던 자기와 세계의 완전무결한 통합이 있다. 또 한쪽 끝에는 그 ‘우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어 직면했던 자기와 세계의 완전한 분리(죽음)가 있다. 양자는 실상 다른 것이 아니다. 둘 다, 가까스로 나타나는 ‘나’의 정체성을 잡아채어 바스러뜨릴 만한 위협이다. 분리의 순간 쓰쿠루가 통합을 원하는 대신 죽음을 갈구한 것은 그러므로 매우 자연스럽다. 통합과 죽음은 같은 심연이니까. 이 심연의 한 치 앞에서 쓰쿠루가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꿈에서였지만) “그녀의 모든 것”을 원하는 “격렬한 질투”, 즉 통합(죽음)의 불가능성을 감지한 직후였음은 기억해 두자. 저 심연에 닿으려는 갈망조차도 거기에 닿지 않아야만 지속 가능한 삶의 일부임을 알았을 때 그는 간신히 삶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불안한 균형을 향해, 한 발 한 발 “착실하게 늙어 갔다.”
그리고 그는 서른여섯이 되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던 스물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끝내 ‘순례’를 떠나고 또 돌아온다. 그런데, 오래도록 일상의 평정을 잃지 않고 지내 온 쓰쿠루가, 왜 이제 와서 문득 과거를 되짚는 것인가? 새삼 ‘순례’를 떠나기 전까지 그는 아프지 않은 상태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함으로써 정녕 무엇이 달라졌는가? 이런 질문들이 야기된 지점, 그러니까 쓰쿠루의 ‘순례’가, 이제 막 시작되려는 사라에 대한 사랑과 맞물려 있는 이 정확한 배치는,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사랑이라는 통합 (불)가능성에 다시(새롭게) 맞닥뜨린 쓰쿠루에게, 통합과 분리를 길항하는 균형은 더 이상 안전할 수가 없다. 과거의 아픔 때문이 아니라 현재 새롭게 발원된 낯선 감각 때문이다. 사라를 처음 만난 날 예기치 못하게 그를 휘감았던 “감촉과 자극”이야말로, 별안간 자신의 삶이 낯설어지고 주변의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느끼게 할 출렁임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일상의 연속적 운동이 깨지려는 순간, 통합과 분리의 드라마가 다시 쓰여야 함을 쓰쿠루가 직감한 것일 수도 있다. 사라를 향한 열망은, 지난날 죽음의 문턱에서 그를 삶의 방향으로 되돌렸던 바로 그 지점의 격렬함을 충분히 닮은 것이기도 하다. 지금 쓰쿠루는 다시 한 번, 자기가 놓여 있는 세상에 새로운 선분을 그어야 할 때다. 그 결심과 실천이 곧 옛 친구들을 찾아 떠난 쓰쿠루의 ‘순례’였으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쓰쿠루는 이제 사라와의 사랑으로 인해 벌어질 삶의 새로운 패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요량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과거의 사건을 이윽고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에? 결코 아니다. 그에게는 끝내 “돌아가야 할 장소가 없다.”는 것을 그가 마침내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에게도, 누구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는 ‘돌아가야 할 장소’ 같은 것이 없다. 있다면 오직 죽음과도 같은 완전한 통합이거나 완전한 분리, 즉 삶 바깥의 어디일 것이다. 살아가는 일은 ‘향해야 할 장소’도 ‘돌아가야 할 장소’도 없이 다만 ‘다가올’ 것들을 ‘미묘’하게 느끼며 ‘지금’을 지나는 일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와 이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라면 이것이 첫째 줄이다.

다시 말하지만, 통합과 분리 사이의 불안한 균형이 파괴당하는 순간, 세상이 두렵고 내가 낯설고 사물이 어지러워질 때, 그러나 여전히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는 변경되지 않는 시공간적 구속 위에 존속함을 너무도 잘 아는 이, 그는 이야기를 짓는다. 상황을 재분할하고 세계를 재정립하여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키려는 것, 그것이 이야기의 의지이고 목적이다. 그렇다, 이것은 쓰쿠루의 행보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35년 동안 소설을 쓰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한 얘기다. 그의 이야기가 이 세계에 긋는 길과 역은 언제나 ‘나로서’ 살고 있는 하나의 독자적인 삶에 바쳐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계의 질서를 ‘현실적’으로 반영하기보다 한 개인의 운명을 위해 재배치된 시공간으로서 의미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 질서는 한 세계를 고정하여 의미를 만드는 것이라기보다 언제든지 또 지워지고 다시 그어지는 새로운 선분들로 인해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의미를 가리키는 것이어서, 세계란 결국 무수히 많은 세계의 흔적들과 가능성들의 지평임을 상기시키는 데 이르곤 한다. 때문에 하루키의 인물들이 살아 있는 그 세계는 ‘현실’의 안락한 논리가 아니라 현실을 낯선 곳으로 활성화시키는 경이로운 질서에 지배되는 곳이자, 또한 그러한 세계가 단 하나인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이 있었거나 있을 수 있다는 예감으로 우리를 이끄는 세계다. 거기에서는, 이미 창조된 것의 엄연함을 언제나 창조 중인 것의 이질감이 대체한다.

하루키의 소설들, 언제나 창조 중인 그 세계가 우리 눈앞에 ‘물리적 형태’로 드러나는 그 소중한 멋진 문장들,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란 영원히 빗나가고 영원히 모자랄 일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에 관해 아무 말 하지 않기도 하염없이 아쉬운 일이기는 하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사정은 비슷할 테니 임의로 한 대목만 옮겨 본다. “그는 매일 욕실 거울 앞에 서서 잠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새로운(달라진)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마음에 새겨 갔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고 그 문법을 암기하듯이.”(65쪽) 그도 많은 작가들이 그렇게 말하듯 자기는 그저 골똘히 관찰하고 세심히 묘사할 뿐이라고 하지만, 아니다. 그의 관찰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고, 그의 묘사는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의식에 관찰이, 재구성에 묘사가, 자연스레 끼어들었겠으나, ‘관찰과 묘사’라기보다 ‘의식과 재구성’이라고 하는 편이 더 합당할 것 같다. 하루키 소설 전체에 대해 종합적인 느낌을 말해 본다면, 세계를 묘사한다기보다 세계의 조각을 만들어서 그것을 (재)배치하고, ‘나’를 표현한다기보다 나의 조각을 그려 만들어서 그것을 (재)조합하는 쪽이라고 하겠다. 배치와 조합에는 박자가 들어서기 마련이라, 늦어도 이야기의 초반을 넘어설 무렵이면 어김없이 리드미컬한 패턴이 이미 들어서 있다. 화소의 배열에 따라 화자의 억양도 배분되고, 도드라지는 지각들은 악센트로 삽입된 느낌이랄까? 조만간 이 리듬에 올라타기만 하면 그로부터 쭉, 이 “새로운, 의미 있는 장소”에서의 여로는 순탄해진다. 하루키 소설이 쉬이 읽히는 까닭을 서사의 대중적 코드로만 호도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필시 이 유려하고 신나는 리듬을 탈 재능이 없는 박치일 것이다.

하루키의 잡문 중 어디에선가, 먼 지인에게 인사를 건네려 했으나 미묘한 어색함 때문에 그러지 못했던 얘기를 하면서 그가 자기 스스로 “본래 순박하지 못한 성격”이라고 반농담조로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순박하다’는 것은 단순하고 직설적이라는 뜻일 텐데, 스스로 순박하지 못하다고 고백하는 저 태도에는 어쩐지 순박함이 조금쯤 묻어 있는 듯도 하다. ‘하루키 풍’이라 불러도 될 만한 어떤 분위기의 솔직 담백한 느낌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자기가 순박하지 않은 성격이라고 굳이 밝히는 저 태도에는 어쩌면 자기를 지적하는 일의 순박함까지 고려하는 순박하지 않은 성격이 더 많이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하루키 소설의 솔직 담백한 느낌은 순박한 데가 있을지도 모르는 작가의 평소 기질과 성격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결코 단순하고 직설적일 수 없는 작가의 작업 방식과 습관의 산물일 확률이 더 큰 것 같다는 말이다. 요컨대, 이야기를 짓는다는 것,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절대로 단순하고 직설적인 일, 그저 순박한 일일 수가 없다. 세상에 순박하게 대면해서는 어떤 이야기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드는 일(作爲)이란, 그것이 어떤 단순화와 간결화를 통과하더라도, 순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하루키의 작가적 성실성은, 언뜻 (순박하게) 생각하면 자연인 하루키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의 연장으로 이해되기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하루키풍’의 분위기가 탄생하기까지, 그것은 한 편의 서사 안에서 계속되었고, 여러 편의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 계속되었으며, 지치지 않고 일정하게 쓰이는 잡문들을 통해 계속되었어야 했다. ‘계속된다’는 것은 무엇이나 그다지 용이한 일은 아닌 것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하고, 다부지고 엄격한 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테크닉에서 기인하는 일이 아니라 일종의 ‘공정한 정신’을 상정하는 일이며, 따라서 아무래도 ‘도의적’인 것과 관계가 없을 수 없다. 그러니까『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대하여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하면, 또 한 편의 하루키 소설을 읽고 또 다시 내가 경탄한 이유도 틀림없이 이 순박하지 않은 계속성과 관계가 없을 수는 없다는, 그런 말이다.